<신성모독 프롤로그> 시간으로 따지기 어려운 어떤 때. 장소로 따지기에도 어려운 어떤 곳. … … … … 류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왜 여기에 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검은 물결이 흐르는 강이었다. 검은 기암절벽들이 가득하고, 서 너 사람이 탈 수 있는 작은 배 밑으로는 물살이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누군가 배를 몰고 있었다. 그 곳에 앉아서 강을 건너는 일은 류 혼자였다. 류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어졌다. 어디로 가는지, 왜 여기에 왔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뭔가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치밀 듯 솟아오른다는 점이다. 목이 메이고, 숨이 막혔다. 갑갑한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벌떡- 류는 그만 위태롭게 배 위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뒷골을 잡아당기는 듯한 참을 수 없는 통증이 가슴을 뚫었다. 뻥 뚫린 가슴 위로 시리고 찬 바람이 흘렀다. 노를 젓던 남자가 그런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겁니까….” 표정없는 사내를 향해 류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 끝도 없는 검은 강의 위에, 검은 안개로 둘러쌓여 있는 것이다. 주변이 온통 회색이고, 어딘가 알 수 없는 상실의 비명들이 만든 바위들 같았다. 바위들 하나 하나, 절벽 하나 하나가 깎아 내린 듯 솟아 있어서 너무나 웅장하고, 또한 슬펐다. “지금 류 님이 건너고 계시는 곳은…” “……???” “… 망각의 강입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류가 의심쩍은 눈빛으로 쳐다보자, 어디선가 다시 검은 바람이 불었다. 노를 젓던 사내는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뭍을 가리키며 표정없이 말했다.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 “이 강을 건너셨기 때문에 이전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셨습니다.” 그럼 난 죽었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류는 턱까지 차오르는 이상한 울분을 힘겹게 삼켰다. 명치 끝이 얼얼했다.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왜 이 기묘한 슬픔이 마음을 죄여오는지 알 길이 없었다. 꿀꺽- 따갑고 아픈 목에 침을 넘기며 류는 말문을 열었다. 표정없는 잿빛의 사내가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럼… 내가 죽었다면…” “… 다시 태어나시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선택한 나라에, 선택한 영혼으로…” “…그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내가 죽었다는 것도,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어한다는 것도 다 이해한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럼…” “…….” “… 모두 잊는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왜 저는 울고 있는 겁니까…” 류는 강가로 바람이 스칠 때마다 입가에 와 닿는 짠 기운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강가의 소금기가 아니었다. 바다처럼 넒은 강이었지만, 이 곳은 모든 것이 무채색이고 무향이었기 때문이다. 류는 참을 수 없었다. 왜 울고 있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지만, 견딜 수 없는 감정이 온 몸을 소름처럼 에워쌌다. 노를 젓던 사내는 그런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 뒤에야 표정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라고. 기억을 잃은 류는 아무 것도 대답할 수 없었다. “류님이 지금 보시는 이 강은… 건너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제각각으로 보입니다.” “……!!!”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마음이 이 강처럼 검고, 어둡고, 슬프고, 비장하다는 의미이다. “이 강의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는 것도… 이 강물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도… 모두 당신의 마음 탓입니다.” “……!!!” “그러나 당신이 아무리 울고, 원통해하고, 슬프고 애절하여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아무 것도….” 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빠지는 숨소리 탓인지 바람이 점점 거세게 불었다. 이마에 와 닿는 죽은 이의 숨결같은 찬 바람. 소름 끼치는 적막감과 강 흐르는 소리 아래에서 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제가 왜 이런 마음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그러자 사내는 노를 내려놓으며 가볍게 고개 끄덕였다. “절대로 기억하지 못합니까?” “절대로.” “…그래도 만약 당신말처럼… 다음 생애에 태어나서 기억하게 되면…” 왜 이렇게 절박한 마음이 드는 걸까. 잊어서는 안 돼…. 잊어버리면 안 돼…. 나는 뭔가를 두고 왔잖아. 절대 잊어선 안 돼…. “류 님….” 사내는 노를 내려놓고 뭍으로 배를 끌었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저으며 무심히 대답했다. “이 강을 건너기 전에, 당신은…” “…….” “… 저번 생애와 이 곳에서 일어난 어떤 것도 기억하지 않겠다고 신성에게 맹세했습니다.” “신성…에게요?” “예. 신의 성품, 신의 본질… 신성(神聖), 신의 성스러움에게 맹세했습니다.” “제가요? 왜…요…” 알 수 없다. 가고 싶지 않았다. 남겨놓고 싶지 않은 뭔가가 남겨져 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선택했다. 마음이 깨어지고 조각난 것처럼 난도질 당한다. 그러나 이 남자가 말했다, 그 모든 것이 나의 선택이라고. “당신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기억해서도 안 됩니다. 누군가가 당신에게 기억을 돌려놓을 수도 없고, 그런 짓 역시 신성에 대한 모독입니다.” “…….” “안녕히 가세요. 수십 개의 문 중에 당신이 목적으로 하는 영혼의 문을 열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남자는 자신을 남겨놓고 떠나려고 했다. 류는 다급하게 그를 잡았다. 아직 입가에 떨어지는 소금끼를 감당할 수 없었다. 안 돼… 라고. 서늘한 바람소리가 휘파람처럼 머리를 늘어뜨리고 운다. “한가지만…” “…….” “… 한가지만 제발 알려주십시오…” 간곡하고 떨리는 목소리에 남자가 멈춰섰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눈을 바라보며 류는 더듬거렸다. “아까 저에게… ‘선택’이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남자는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망설이지 않고 조용하게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싸하게 심장을 질러갔다. “당신은 신을 선택했습니다.” “……!!!” “그 결과, 당신을 목숨처럼 사랑하던 사람에 대한 기억을 뺏겼습니다.” “……!!!” 발끝부터 전율이 느껴졌다. 목숨처럼 사랑하는… 누군가… 기억치 못하게 될 누군가… 그럼 나는 그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그래서 그 사람 대신 신을 선택했나…. 무슨 의미인가…. 나는 왜 내 선택이 이토록 참혹한가…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두 사람은 입을 벌리지 않고 이야기 중이었다.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군가 당신에게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주는 것도 반역입니다.” “제발…” 남자가 짧게 고개 젓는다. 이 표정없는 사내에게서 뭔가가 전이되어 왔다. 그는 이 내막을 다 알고 있는 영혼이었다. 아주 짧게… 그리고 안타깝게 그가 자신을 쳐다보았다. 만약 지금 다시 태어난데도 절대 잊지 않을 목소리로, 그런 애처로운 눈빛으로 잠시… 남자는 자신을 응시했다. “한 가지만 알려드리죠.” “…….” “…당신은 그 사람을 소멸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했습니다. 상대방은 당신에게 선택받으면, 죄의 값을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 그 사람이 주는 사랑 자체가… 금지였습니까…” 뭔가 어렴풋이 기운이 들었다. 류가 가까스로 묻자, 사내는 조금 끄덕였다. “금지였습니다.” “……!!!” “…그리고 금기였습니다.” “……!!!” “그 영혼에게는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번뇌입니다.” “……그렇다면…” 조금씩 알 것 같았다. 기억나진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는 동안 마음이 찡- 하고 울려서 류는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주변의 공기가 조금씩 달라진다. 아까까지 날카로운 칼날처럼 모질게 불던 바람이 조금씩 젖은 바람으로 변해갔다. 조금 더 따뜻한 공기였지만, 물기 가득한 기분이 안개를 점점 더 깊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저는… 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습니까?” 마지막으로 확인하듯이 묻자, 사내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네.” “그런데… 왜 슬픈 겁니까…”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류의 간절한 눈빛에 사내가 조금 흔들렸다. 내내 표정 없고 서릿발 같은 그 얼굴은 참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을 쳤다. 그때야 처음 사내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라고. 그는 비슷한 말을 던지고 있었다. “그러길래… 왜 그러셨습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더 이상 인내하기 힘들다는 음성이었다. 류는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이유는 역시 알 수 없었다. 단지, 사내의 음성에 섞인 지독한 책망 때문이었다. “당신은 아직도 그 분에 대해 모르는 겁니까?” “……???” “… 그 분은 당신과 같이 소멸되길 원했을 뿐입니다. 그 분은 자신이 죽는다는 걸 알고도 당신을 선택했습니다…. 그게 그 분의 수 천년 된 고뇌를 없애는 길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 사내의 목소리가 마침내 갈라졌다. “당신은 그 분께 마음의 한 부분도 알려드리지 않았습니다…” “……!!!” “…그 분도 당신에 대해 어떤 마음인지 스스로 알지 못했습니다….” “……!!!” “당신이 어떤 신성한 것을 위해서 그런 거짓말을 했던…” “……?” “그 분은 자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겁니다. 당신과 더불어서….” 강이 메마르기 시작했다. 류는 가만히 굳어 있었다. 사내 또한 멀어졌다. “당신은 그 분이 죽는 것을 막았을지는 모르지만…” “……???” “… 그 분은 당신으로 인해 죽는 것보다 못한 것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작별을 고했다. 안녕히… 라고. 류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 … … … 21세기, 한국. 모든 기억은 상실 되었다. 기억이란, 그것을 소유한 자에게만 상처가 될 뿐이다. … … … … “벗어라.” 기령이 말했다. 류의 눈동자가 전율로 떨린다. 이 자의 존재가 그 무엇이든, 이것은 납치이고, 또한 범죄이다. 그가 처벌받지 않는 신의 영역 속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남자는 단호했다. 자신의 모습을 서늘하게 관찰하며, 사내는 다시 무표정하게 칼 끝을 들었다. 쓰윽- 날카로운 칼날의 면이 류의 턱 위로 스쳐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옷을 벗어.” “……!!!” 류가 눈을 들어 바라보는 순간, 그의 검은 눈동자는 이미 자신을 가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벗겨 질테니.” “……!!!” 칼 끝이 보다 날카롭게 턱 아래로 들어왔다. 표정없고 차가운 금속이 자신을 애무하듯 천천히 목을 따라 흐른다.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자, 그러나 살기가 아니라 숨막히는 관능의 방식으로 칼끝을 내리는 묘한 자…. 그의 이름은 기령. 혹은 또 다른 세계에서는 아이언이라고 불리는 자였다. 스륵- 하고 류는 자신의 몸에서 옷감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날카로운 칼 끝이 종이를 베듯 부드럽게 옷감을 베었다. 어쩌면 한치의 오차도 없는 이 사내가 바로 이전부터 자신의 동반자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두 사람은 지금 적이고, 증오의 대상이며… 더군다나 기령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자신을 범하려 하는 것이다. 기령의 단 한번의 칼 끝이 류의 신부복을 갈랐다. 류는 훅- 하고 숨을 삼킨다. 불분명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야 했다. “기령…” 그러나 기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칼자루를 쥐고, 무딘 칼등의 날로 벌려진 옷섬에 밀어넣는다. 차가운 감각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아이언!!!” 좀 더 강하게 불렀다. 그 쯤에야 그가 웃었다. 희미하고 야하게…. 그러나 억누를 수 없는 어떤 감정이 그의 꽉 깨문 듯한 입술에 담겨져 있었다. “둘 중에 하나가 죽자. 그럼 끝나는 거니까.” 그 웃음 끝에 기령이 말했다. 류는 뒷걸음치지 않았다. 왜일까…. 이 사람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미어지게 마음 밑바닥에서 차 올라왔다. 그것이 후두둑 벗겨져 나가는 자신의 옷자락을 막지 않는 이유였다. … … … … 어쩌면 알고 있어야 했다. 류가 밤마다 꾸는 이상한 꿈…. 높은 기암절벽들이 가득하고 안개로 휩싸인 광활한 강, 그 강을 건너며 이상하게 뒤를 돌아보던 그 억눌린 슬픔을 기억해야 했다. 그런데도 류는 아직 알지 못했다. 이 사내와 자신이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처음 만났을 때, 그래서 기령이 자신에게 제안했는지 모른다. 『나를 기억해내라.』 『…….』 『아니면 그 신성한 몸을 더럽히면서 기억을 강요당하든지.』 <신성모독 1> 태초에 빛이 있었다. … … … 그 빛의 대폭발이 있은 후, 세상은 여러 조각의 에너지로 나뉘기 시작했다. 각자 대우주의 에너지를 닮은 계(界)로 시작된 세상이었다. 수많은 계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21세기라고 생각하는 인간계와 얽힌 세 가지 세계가 있었다. 우주의 에너지들 가운데 가장 타락한 종족들의 세상인 마계(魔界), 그와는 반대로 가장 신성한 에너지를 받은 종족들의 세상인 신성계(神聖界), 그 둘은 대표적인 영적인 세계, 천계(天界)에 속했으며, 모든 종류의 문명에서 그들의 전쟁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들의 싸움 중간에 얽힌 두 개의 중립계가 더 있었다. 그들의 외곽에 천계에서 3차원인 인간계로 영혼을 인도하는 환생계(還生界), 마지막으로 정작 우주의 에너지를 모두 나누어서 태어났으나, 그들 자신은 그런 비밀 자체를 망각한 인간들로 이뤄진 인간계(人間界)가 있다. 태초에 빛이 갈라지면서, 여러 갈래로 나뉜 이들 세상에서… 모든 세상의 종족들은 연합체였다. 초기에 우주 에너지 연합에 반대한 타락계의 마족들은, 신성계의 강력한 전사 ‘미카엘’의 의해 가장 낮은 레벨의 에너지계로 추방당했다. 전사이자 천사라고 칭해지는 미카엘은 한 때 자신의 형제였으나 마족들의 수장이 된 타락한 신성 ‘루시펠’을 영원히 마계에 봉인한 것이다. 그리하여, 우주는 낙원계…. 후에, 이 낙원을 세운 남은 세계들, 특히 주축이 되었던, 인간계, 환생계, 신성계들은 자신들의 가장 좋은 부분을 따서 자신들의 대표자로 신성한 빛을 만들어냈다. 그것을 ‘신(神)’이라 칭하고, 각종 기록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중립계였던 ‘인간계’에서 큰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더군다나 그들 자신이 만든 가장 완벽한 존재 ‘신’을 가장 많이 닮은 영혼이었다. ‘인간’들은 행성 가이아를 차지하는 3차원의 생명체였으며… 실제로 그 지구 위에서 몇 번이나 문명을 세웠다가 멸망하고, 다시 세우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인간들이 ‘아틀란티스’라고 부르는 12번째 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때로는 아틀란티스, 잃어버린 제국이라고 부르는 이 세대는, 지금까지 지구를 거쳐 간 12세대 인류였다. 아틀란티스 말기는 지금까지 지구 위에서는 한번도 없었던, 모든 문명의 최고를 이룩했다. 최고의 문화와, 최고의 영적인 에너지와, 최고의 과학기술까지 섭렵한 아틀란티스들… 그들은 급기야 초대 1세대 인류부터 맺어온 우주계의 동맹을 깨는 일까지 서슴치 않았다. 인류 1세대 때 마계로 추방되어 영원히 봉인된 루시펠은, 아틀란티스의 최 전성기에 다시 살아났다. 중립계였던 인간계가 신성계와의 동맹을 깨고 마계의 편이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신성계의 수호자 ‘신족’들과, 마성계의 수호자 ‘마족’들의 영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우주 에너지의 가장 완성형인 ‘신’은… 동맹을 깬 인간들의 12번째 문명인 아틀란티스를 멸하고, 그 자리에 남은 인류들이 새로운 13번째 문명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이런 기억들에 대해 다소 어렴풋이라도 기억하고 있는 아틀란티스의 남은 후손들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더라.」 … 「천사들의 하늘에서 일어난 사건이 있으니…」 … 「오, 아침의 아들 루시퍼야, 네가 어찌 하늘에서 떨어졌느냐! 민족들을 연약하게 하였던 네가 어찌 땅으로 끊어져 내렸느냐!」 … 「당시에 땅에 거인들이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으니,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사람들의 딸들이 그들에게 자녀들을 낳았을 때이며, 이들은 옛적의 강력한 사람들이요, 유명한 사람들이었더라. 땅에서 사람의 사악함이 창대해지며 그 마음의 생각의 상상이 모두 계속해서 악할 뿐임을…」 … 「보라, 땅이 부패하니, 이는 땅위에서 모든 육체가 자기들의 길을 부패시켰음이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육체의 끝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이는 땅이 그들로 인해 폭력으로 가득함이라.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너는 잣나무로 방주를 짓되 그 안에 방들을 만들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 … … … … 다만 단, 한 가지. 인간의 잃어버린 시대 ‘아틀란티스’는 누구보다도 영적인 능력이 강했던 시기였다. 때문에 신을 모시거나, 천상의 신족들을 모시는 자들이 가장 신력이 높았던 시기였기도 했다. 이 아틀란티스가 해일과 바다로 침몰하기 직전에… 신족들 중에 가장 강한 전사였던 ‘미카엘’의 환생체(*천사 미카엘로부터 분리되어 나옴)로 나온 두 신족, ‘길리언’과 ‘아이언’을 모시는 자들은 신력이 높으며 특히 예언에 능하였다. 당시대에 위대한 예언가로 이름이 높았던 자 중 하나가, 침몰하는 대륙에 남은 생명들을 위해 남긴 예언서 ‘사자의 서’를 남겼다. 이 사자의 서에는 중립이었던 인간계를 흡수하는 비책이 달려 있다고 믿어졌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위대한 예언가는 이 예언서를 봉인하였다. 그는 이 비서를 열어볼 시기를 정해주진 않았으나 단 한 가지의 조건을 남겼다. 후에 사라진 아틀란티스의 영혼들이 다시 지구에 환생을 하고… 그들 중 예언자 자신이 정하는 6명의 영혼이 모였을 때야 이 예언서를 열어볼 수 있다는 조건이 달린 것이다. 예언서는 예언가가 모셨던 신족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신족들은 예언가가 조건으로 만든 ‘아틀란티스의 다음 환생자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려왔다. 그것은 12세대 아틀란티스가 망하고, 다시 인류가 시작되었으나 여전히 마족과 신족의 영적 전쟁이 치열하게 다다를 무렵에는 더욱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지구 상 인간의 기원으로 21세기, 지구의 태양력 200*년. 이제 우주는, 마계가 중립이던 환생계를 끌어들여 더 힘을 얻었고, 유일하게 남은 신성계와 대립을 이루었다. 그들 모두의 마지막 과제는 여전히 중립이면서 아틀란티스 때의 실수로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 인간계를 흡수하는 일이었다. 지구상에는 점점 전 세대 아틀란티스들의 영혼들이 다시 환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때문에 신족과 마족에 얽힌 비밀들을 알아내고 각각 그들을 위해서 일하는 인간들이 많아졌다. 영적 전쟁이 격렬해질 무렵, 신족들은 전 세대 예언가가 남긴 비결서를 열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그리고… 어느 날 한 인간이 인간계에 건설된 환생 마족들의 근거지로 납치 되었다. <신성모독 2> 류는 납치된 자였다. 그는 지금 껏 신의 보호 아래에서 살았다. 자신이 납치된 이유가 신성한 천사들을 위해 일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온지 어언 26년… 그러나 일년 전에 만난 묘령의 청년, 그리고 그 자신의 입으로는 ‘천사적 존재’라 불리는 ‘기’에 의해 신과 그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는 기와 그를 둘러싼 신성계를 위해 일하는 인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일년을 정보원으로 일하고… 그리고 그는 한달 전 쯤에 이 곳에 잡혀 온 것이다. 처음 그가 잡혀 오던 날, 장내는 장터처럼 어지러웠다. 그 자리에서 류는 기령을 처음 보았다. 이름은 물론 누차 들어왔었다. ‘기령’이라는 자는 인간의 몸을 빌려 환생한 마족들의 가장 우두머리였다. 혹자들은 그를 성족의 배신자인 아이언이라고도 불렀다. 한 때 성족이었나 어찌된 이유인지 스스로 마계로 건너간 반역자 아이언이다. “얼굴을 들어라.” 기령의 싸늘한 말에도 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가장 상석에 앉은 자의 명령인데도 그는 꼼짝도 않고 있었다. 기령 역시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하게 다시 말했을 뿐이다. “고개를 들라고 했다.” 거듭해서 종용하며 눈짓을 보내자, 기령의 수하 중 하나가 불쑥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자신이 모시는 자인 기령의 명(命)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걸어 나온 자는 무표정한 기령의 얼굴을 살짝 바라보더니 이윽고 험악한 손길로 류의 머리카락을 거머쥐었다. “……!!!” 류의 입가에서 짧고 흐린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만 너무 희미해서 현실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다. 곧 이어 다소 거친 손길이 헝클어진 류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쓸어넘겼다. 그 바람에 류는 원치 않게 기령의 시선을 고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오싹 오싹- 살을 짓무르는 시선이다. 마치 원하던 것이 잡혀 왔다는 듯 잔인한 본능이 담긴 시선이다. 류는 그 눈길에 잠시 숨을 삼켰다. 짙고 어두운 눈동자가 자신을 핥아가듯 속속들이 관찰하고 있었다. 류의 체격은 오랜 운동으로 탄탄하고 군살이 없었지만, 그의 얼굴은 여자나 남자나 모두 좋아할 정도로 미색이 있었다. 그 미색이 어딘가 불분명한 안개같다는 것이 다소 문제였을 뿐이다. 류(流)라는 이름에 걸맞게 아련하고 희미한 뭔가가 있는 것이다. 조금 갸름한 얼굴 위로 자리잡은 정갈한 눈썹, 고집스러운 입매와 깨끗한 턱 선이 아름다웠다. 그러나 눈동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잡혀 온 자에게 흔히 볼 수 있는 공포나 두려움 대신에 예상할 수 없는 초연함이 담겨 있었다. 기령은 기대어 있던 의자에서 조금 상체를 내민다. 싸늘한 눈빛이었다. “과연…” 그는 표정없이 입을 열었다. “유명한 전사의 ‘기’의 연인답다.” 그 말에 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서늘하고도 담담한 얼굴, 그러나 적의 앞에서 기죽지 않는 품위가 뒤섞인 깨끗함- 아무리 휘저어놓아도 망쳐질 것 같지 않은 그런 눈빛으로 류는 그 말을 되받아친다. “잘못 알고 있습니다.” “…….” “저는 전사의 연인 따위가 아닙니다.” “…….” “제가 전사입니다.” 물론 이 쪽도 만만치 않았다. 기령은 그 말에 콧방귀를 꼈다. “어디, 마음대로.” “…….” “너는 이미 잡혀 있으니.” “…….” 무성한 소문을 남기고 있는 전사의 연인, 혹은 그 자신의 주장대로 전사일지도 모르는 자, 류(淵葦)는 그 말에 대답치 않았다. 그저 수려한 얼굴로 무표정하게 기령을 쳐다볼 뿐이었다. 기령 역시 가면같은 차가움으로 쓰윽 웃었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서 이 사태를 곰곰이 지켜보는 유퍼를 향해 명령했다. “그를 가둬라.” “아이언님…” “잔 말 말고 가둬. 물 한모금도, 음식 한 조각도 안 된다.” “하지만…” “유퍼, 잔소리는 닥쳐. 그는 인간일 뿐이다.” 어딘가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유퍼는 기령의 밑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온 오른 팔이었다. 그는 낮고 희미한 일본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공식적으로 말할 수는 없되, 기령의 처사에 조금 불만이 섞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비밀스러운 전투의 사령관이 바로 아이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기 전에 그를 아이언이라고 불렀고, 이제는 기령이라고 부른다. 이 곳에서는 그의 말을 거부할 누군가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있다면 오늘 붙잡혀온 류 정도 밖에는 없었다. 혹은 류의 상관인 기라는 자 밖에는 없었다. 류를 납치 해 온 자들은 차갑고 잔인했지만, 그 중에서도 기령은 가장 으뜸이었다. ***** 차가운 지하 감옥의 문이 잠겼다. 철커덩- 짧은 쇳소리를 내며 류의 손목에는 쇠사슬이 감겨 버렸다. 그는 조금 몸을 불편하게 움직여 본다. 인간인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류는 고개를 흔들며 한숨쉬었다. ‘사실 이렇게 된 이유는 오직 내가 성윤이… 아니, 기를 만났기 때문이지.’ 그런 후회도 지금은 필요 없었다. 류는 어쨌든 잡혀 버린 것이다. 그것도 그 자신을 이 세계로 끌어들인 성스러운 자, ‘기’의 쌍둥이 동생에게. 기와 아이언. 그들 사이에 일어난 일은, 류가 여기 잡혀 온 이유와도 맞먹었다. 처음 기를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일년 전이다. 류는 그 날을 똑똑히 기억한다. 어두운 뒷골목. 한국의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유곽에서 기를 만났다. 기를 만나기 전까지 류는 정말 평범한 청년이었다. 독실한 종교가의 집안에서 자란 깨끗한 청년… 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던 류가 대학 시절에 매음촌에 간 것은 봉사 활동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그 곳에서 기를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을 ‘성윤’이라고 소개했었다. 그리고 매음녀들의 조직배들에게 쫓기는 류를 구해주었다. 그 자리에서 이 기막힌 우연에 감사하는 류에게 성윤 (-혹은 나중의 ‘기’)은 웃으며 말했다. ‘신의 세계에서는「우연」이란 있을 수 없지. 나에게 감사할 필요 없어.’ 기는 외모가 출중한 사내였다. 후에 그 자신이 류에게 알려준 인류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건데,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물론 이해했었다. 아무튼, 류가 가진 첫 인상은 그것이 전부였다. 같은 인간이 저렇게 성스러운 눈빛을 가질 수 있는가, 혹은 저토록 순결한 청년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처음에는 같은 봉사 활동을 하는 종교 단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두 사람이 만난지 두어달이 지났을 무렵, 기는 드디어 류에게 뭔가를 털어놓았다. 류의 입장에서보면, 그것은 준비 하지 못한 공격과도 같았다. ‘류, 너와 처음 만났을 때, 넌 매음녀들의 기둥 서방들에게 쫓기고 있었지?’ 류는 그 날을 떠올렸다. 아무런 의심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기가 환하게 웃었다. 가끔 그의 웃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신비로워 보였다. 류는 그가 왜 그런 미소를 지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내가 이 곳으로 오기 전에 보았던 모습과 같군’ ‘……???’ ‘내 말 잘 들어, 류. 이건 중요한 말이야.’ 기의 밝은 갈색 머리가 햇살에 부딪쳤다. 언제나 그를 보면 ‘낮의 사람’이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머리카락이다. 가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갈색 눈동자는 그 순간 정확하게 류의 얼굴을 관통했다. 두근 두근…. 류는 그를 만난 이례, 최초로 웃음끼 없는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뚫어질 듯한 눈동자로…. ‘나는 너를 알고 있어.’ ‘… 무슨 말을… 당연하잖아. 우리는 두 달전에 골목에서…’ ‘… 아니, 나는 너를 10년 전에도, 100년 전에도, 1000년 전에도 알고 있었어.’ 처음에 류는 웃었다.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기는 진지했다. ‘내 이름은 성윤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어디 아파?’ 생글 생글 웃으며, 인간의 나이로 치면 류 자신보다 서너 살은 어린 스물 넷의 청년 기는 그 말에 짧게 고개 저었다. ‘내 원래 이름은 기.’ ‘……???’ ‘… 나는 13세대 인류를 접수하기 위해서 온 성족의 사자(使者)중 하나다.’ ‘……!!!’ 13세대 인류, 그리고 성족, 또한 사자(使者).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류는 잠시 숨을 멈췄다. 시간이 몇 초인가 흐르고, 기는 마치 자신의 말을 증명하듯 신의 사자답게 웃었다. 막 저무는 해가 그의 뒷머리에서 목덜미로 퍼지며 금색의 후광을 만들었다. 류는 눈을 가늘게 떴었다. 그곳에는 날개를 단 천사라든지, 신의 영능이라든지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은 여전히 류와 기가 한참을 드나들던 도시 외곽의 유곽이었고, 저녁을 맞기 위해 막 가로등이 켜진 외로운 골목길이었다. 마침, 발밑으로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지나갔다. 기의 친구들이 등 뒤 저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와 친하게 지냈지만, 단 한번도 인사를 나눠보지 못한 그의 동료들이었다. 그렇다. 그곳에는 천사의 ‘천’자 같은 어떤 증거도 없었다. 바다가 갈라지거나 하늘에서 구름이 갈라지거나 금색 가루가 뿌려지거나… 뭐, 그런 종류의 기적은 그곳에 없었다. 그러나 류는 천천히 소름이 끼쳤다. 그는 방금 자신이 들여다 본 남자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소름의 원인이 뭔지를 깨달았다. 기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동안, 그의 입은 내내 닫혀 있었다. 류는 잠시 넋이 나갈 정도였다. ‘……!!!’ 인간의 세계에서는 누구나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어야 한다.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기는 잘생기고 예쁜… 그러나 평범한 청년이었다. 약 5분 전까지는…. ‘내가 왜 입을 열지 않아도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지?’ ‘…….’ ‘그 밖에도 궁금한 게 많을 거다. 천천히 질문해도 돼. 우리들의 사역은 너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그러나 갑자기 놀라운 광풍이 골목 끝에서 이쪽까지 불어왔다. 류는 마치 현실 세계이지만, 현실이 아닌 듯한 유곽 골목길을 두리번 거렸다. 종이 봉지들이 바람에 나부꼈다. 바랜 잎사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고, 길 고양이들이 냐옹 거리며 기를 향해 엉겨 붙었다. 골목의 담벼락 너머로 잔뜩 붙어 있는 회색빛 건물들이 보였다. 사회에서 가장 외곽에 숨어 있고, 배출구인 이 곳은 모든 건물에서 페인트가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미군들이 들락거린다는 유곽은 철도를 경계로 나눠졌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낙후되고 어딘가 비틀어진 동화 속 세계 같은 이 곳. 그러나 엄연히 현실 속에 존재하는 사내들의 정액 냄새…. 류는 이 곳에서 뭔가가 달라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런 류의 혼란을 감지한 듯, 이제야 자신의 원래 이름이 ‘기’라고 밝힌 청년은 환하게 웃었다. ‘너는 나의 소울 메이트(soul mate)다.' 소울 메이트, 영혼의 동반자.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자, 기가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류는 어찌 할 바를 몰라서 잠시 망설였다. 그러나 곧 언제나 신의 부름과 진리를 찾아 헤매던 류는 성스러움에 대한 유혹에 지고 말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기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이 세계의 비밀들을 들었다. 13세대 인류가 무엇인지를…. 그리고 기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가장 처음에 들었던 말이 아직도 자신의 귓가에 생생하다. ‘류, 너와 나는 인간들이 잃어버린 기억, 아틀란티스 시대 때도 늘 함께였다.’ - 라고. 아틀란티스인지 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쨌든 류는 그 이후로 그들을 위해 일했다. 기를 구원자라고 믿는 성족들을 위해 일해 온 것이다. 바로 그 때문이다, 자신이 마족들에게 납치 된 것은. 더군다나 자신이 잡혀오는 날 보았던 ‘기령’이라는 존재는 마족들의 메시아였다. ***** 류가 잡혀오고 얼마나 지났을까… 유퍼는 아침 신문을 들여다보며 방문을 열었다. 그다지 관심없는 인간계의 일이었지만, 부하들에게 접수하는 것보다 이 편이 현실 실정에 빠르기도 했다. 삐그덕- 그들이 인계(人界)의 진지로 쓰는 낡은 저택의 문이 열렸다. 안 쪽에서 창 밖을 내다보는 기령의 뒷모습이 보인다. 사실 유퍼는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선택으로 이들과 함께 하는 편이었다. 열 아홉에 ‘신은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우여곡절 끝에 기령과 만난 케이스였다. 그는 열 일곱 살 때 사경을 헤매다가 죽음의 건너편 까지 간 적이 있었다. 그 곳에서 바로 사신(死神) 중 하나를 만난 인연으로 마족들을 위해 일하게 되었다. 아니, 뭐… 처음에는 그들의 존재를 알지도 못했다. “아이언.” 기령이 무표정하게 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유퍼는 기령이 서 있는 창가 아래에 의자에 몸을 편하게 앉혔다. 그로서는 이 어리고 말없는 상관이 두려웠지만, 한편으로 뭔가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마도 유퍼 자신이 이 바닥에 들어오면서 들은 하나의 이야기와 관련 있지 않을까…. 때로 이 젊은 상관의 얼음같은 증오 역시, 그 이야기와 관련 있지 않을까…. “아이언님. 지하에 류 님이 갇히신지 사흘이 지났습니다.” “…….” “…그는 인간입니다. 당신처럼 인간의 껍질만 쓴 초인간이 아닙니다.” 그 쯤에야 기령이 성가시다는 듯 몸을 조금 비튼다. 검은 넥타이, 검은 정장, 그리고 그린 듯 아름다운 얼굴과 검고 윤 나는 반듯한 눈매가 날카로웠다. 파멸의 사신(邪神)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싸늘했다. “그래서?” 또한 매우 지루해하는 음성이었다. “아이언. 그 분을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라면…” 조심스러운 말투…. 기령은 표정없이 시선을 돌리며 말 허리를 자른다. “확실히 그가 가진 ‘아카샤’ 조절 능력에는 흥미가 있지. 그가 아틀란티스 때의 그 유명한 예언자 ‘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테니.” “…….” “하지만 정작 본인은 아무 것도 기억치 못한다는 게 문제 아닌가.” 유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카샤…. …어떤 행성 주변을 둘러싼 고밀도의 에너지 층. 아카샤는 그 행성에서 내는 영적인 에너지들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한마디로 지구의 인간들이 어떤 에너지를 집단으로 내게 되면, 그 집단 에너지가 아카샤를 형성하게 된다. 아카샤의 강력함에 따라서 무(無)에서 유(有)의 창조가 진행된다. ‘믿음이 산을 옮기리라’ 라는 말은 결코 헛말이 아닌 것이다. 지구의 심리 철학에서는 이렇게 쌓인 아카샤가 저장된 창고를 ‘아카식 레코드’라고 부른다. 개인의 전생이나 인류의 전 세대들 , 즉 13세대까지 이어온 인류가 그 이전의 세대들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집단의식과 각 개인 기억의 창고다. 물질계에 속하는 인간들로서는 우연치 않게 아카식 레코드에 접근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13세대 인류계, 3차원에서 접근하기에는 쉽지 않다. 오랜 기간 수련을 쌓은 자만이 접근할 수 있다는 아카식 레코드. 또한 집단 아카식 레코드의 기록을 좌우하는 아카샤. 인간 중에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몇몇이나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나간 역사에서 성자나 예언자로 지나쳤으며, 몇은 아직도 살아있고, 또 대다수는 본인의 능력을 모르고 살아가기 일쑤다. 아마도 ‘류’역시 스스로에 대해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일개 기의 정보통 역할만 했겠지. 유퍼는 그런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그들 종족의 정보망에 의하면 ‘류’라는 청년은 평범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는 인간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언자’였다. 그것도 고대의 아틀란티스가 가라앉기 전에, 성족들에게 ‘사자의 서’라는 예언서를 전했다는 그 대 예언자…. 현생에서도 ‘류’라는 이름을 쓰는 지하감방의 포로는, 그 위대한 예언자의 환생체이다. 본인만이 진실을 모를 뿐이다. “결국 류 님을 납치 하신 건 이 쪽에 유리한 일이라는…” 그러나 유퍼의 조심스러운 말에 기령은 차갑게 웃었다. “기가 움직이고 있다.” “……???” “류는 내 형제 기의 가장 공명하는 영혼, 소울 메이트지….” “…아이언…” “어떤가, 유퍼…. 내가 재미있는 제안 하나 하지.” 기령은 몸을 빙글 돌리더니 테이블 위의 컵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유리잔의 감촉을 음미하듯 살짝 쥔 손으로, 매서운 눈매를 유퍼에게 돌린다. 순간, 늘 있는 일임에도 유퍼는 잠시 움찔하고 말았다. 그는 그 모습에 살짝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기령의 쓴 웃음과 살짝 피한 시선에서 유퍼는 사람들이 왜 타락한 천사에게 유혹 당하는지 알 것 같았다. 비록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위험한 말들이 할지라도 말이다. “알고 있겠지만, 류가 다치면 기도 다친다….” “……!!!” “류가 죽으면 기도 죽는다…. 그게 소울 메이트들의 법칙이지. 더군다나 환생한 예언자와 환생한 천사들이라면 더욱 그렇지.” “…아이언!!!” “왜 놀라지, 유퍼? 우리에게 가장 손쉽고 쉬운 방법이야.” 영혼의 짝으로 이뤄진 소울 메이트들의 관계…. 언제나 고대로부터 있어온 구원자와 예언자와의 관계…. 기는 지금 세기의 첫 구원자였고, 류는 거기에 합당한 예언자였다. 예언자가 스스로의 예지 능력을 깨닫기 전에 없어지면, 구원자 역시 사라진다- 그것이 기령이 방금 말한 내용이다. 유퍼는 본능적으로 고개 저었다. “그런 식은 너무 위험합니다.” “…왜?” 다시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한숨을 깊게 들이쉬며, 유퍼는 난처한 마음이 되었다. “왜 위험한지는 본인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오히려 왜 당신이 이렇게 무방비로 일을 벌리려 하시는지가 더 궁금합니다. 당신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저로서는…” “…….” “…이젠 진실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아이언.” 기령이 그 말에 다시 시선을 피했다. 꽉 다문 입술의 양 끝은 언제나처럼 단호했다. 그것이 그의 인간으로서의 나이를 잊게 만들었다. 실제 기령은 유퍼보다 17살이나 어린 스무 살이다. 그런데도 기령은 그가 가끔 보여주는 숨 막히는 힘들과 같이 정체가 묘하게 느껴졌다. 유퍼는 이 곳의 다른 녀석들이 곧잘 이야기 하듯, 그가 가진 비밀이 궁금해졌다. 어쩌면 자신이 이 싸움에서 철저히 마족들의 편이면서도, 이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아이언, 당신들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을 뿐… 다른 계(界)로부터 환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말해줬듯이… 인간계를 접수하고 우주의 아카샤… 에너지를 지배하기 위해 내려온 종족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로 우리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면, 성족들이거나, 그들을 따르는 신성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그런데도 당신은 언제부터인가… 모든 영(塋)들을 없애는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말입니다…. 아주 많은 영혼들을… 진공 상태로 보냈습니다. 블랙홀, zero 0, 빨려들어가는 인력… 그 무엇으로 표현하든… 당신은 적어도 당신의 반대편의 영혼들을 죄다 소멸해왔습니다. 신성계의 영혼들을 소멸하는 것은 상관치 않지만… 아이언님은 필요이상으로 모두 소멸하셨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영험하신 분이니 분명히 제 말 뜻을 아시시라 여깁니다.” 그 순간 기령의 야수같은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유퍼는 적어도 그가 태어날 때부터 그를 거둬서 길러온 자였다. 그의 힘이 두려웠지만, 유퍼는 망설이지 않았다. 오랜 시간 궁금해 온, 적어도 이십년을 궁금하게 여겨온 비밀이 이제는 풀려야 했다. “아이언…. 당신은 한번도 인간을 스스로 데리고 온 적이 없습니다. 직접 데리고 오신 적도 없고, 살아 있는 영혼이라면 더욱 필요없는 존재였습니다, 당신에게는요.” “…….” “…그런데 왜… 류 님만은 직접 모시고 오셨습니까… 그가 전생에서 대 예언가이기 때문이라는 것까지는 이해합니다. 허나 제가 지금까지 모셔온 아이어님은 그가 예언자이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자비를 베푸실 분이 아닙니다.” “…….” “…아니,… 사실 제가 궁금한 것은… 당신이 원래 당신들의 천계(天界)에서 분명 성족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 … 스스로 날개를 자르고 버림받은 낙원, 죽음의 성, 타락한 영혼들의 세계로 스스로 걸어 오셨습니까… 혹시 지금 납치하신 류님과 관계가 있는…” 그 순간이었다. 기령의 눈에서 살기가 스쳐간 것은…. 유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 치고 말았다. 오랫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비록 침착하게 물었으나 역효과였는지 모른다. “아이언….” 유퍼는 숨을 쉬기 위해 애썼다. 그가 미동하지도 않는 눈동자로 노려보는 사이, 숨통이 전기 충격을 받은 듯 멈춘 것이다.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기령은 스스로를 책망하듯 자신을 비난하고 있었다. 소리없는 눈매가 비수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왜 마계로 건너왔냐고?” “…….” “… 아니지… 네가 처음 물었던 것과 합하면 이런 질문이 되겠군. 내가 신성한 성족의 표상을 버리고 마족이 된 것이… 내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손을 댄 인간 ‘류’와 관련이 있냐는 질문이겠군…. 살육을 밥 먹듯이 하는 내가 왜 류를 살려서 직접 데리고 왔는냐-를 묻는 건가?”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탁- 둔탁한 소리를 내며 기령의 손에서 유리컵이 내려졌다. 기령은 유퍼의 질문을 요약하고, 결국 유퍼가 던지고자 했던 질문을 이해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빙글- 몸을 뒤로 돌렸다. 그의 귓불과 아랫입술을 관능적으로 통과하는 차가운 링이 반짝였다. “직접 물어보도록 하지.” “……???” 기령은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유퍼가 류와 그에 관련된 질문을 던짐과 동시에 이를 악물 듯 이야기 한다. 뭔가 이상한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그는 성큼 큰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바쁘게 뒤를 쫓는 유퍼에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갑게 덧붙인다. “어디 한번 그 잘난 류에게 한번 물어보도록 하지. 한낱의 인간 따위가 뭐라고 내가 그를 찾고 있었는지…” “…아이언…” “…만약 그가 기억이라도 하고 있다면 말이야…. 기억이라도 해 낸다면 말이다.” 유퍼가 기령을 따라 간 곳은 계단을 몇 개씩이나 내려가는 어둡고 습한 지하실이었다. ***** 류는 잠시 손을 꼼지락거렸다. 지금쯤이면 저 자상한 ‘기’가 분명히 자신을 찾아다닐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입에 대지도 못했다. 위장이 바싹 말라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갈증 때문에 숨을 쉬기도 어려웠다. 그 찰나에 문이 열렸다. 검은 양복을 입은 유퍼라는 작자와 기령이 함께 들어섰다. 그를 보는 순간, 류는 계속해서 기의 음성을 떠올리고 있었다. 「나에겐 형제가 하나 있다. 내 영혼을 둘로 나눠서 가진 형제지. 그러나 그 녀석은 인간도, 성족도 아니다. … 그 녀석은 스스로 성족의 상징인 날개를 자르고 마계로 건너가 버렸지. … 내가 지금 싸우는 대상이 바로 그 녀석, 아이언이다. 너는 언젠가 그 녀석과 마주치게 될지도 몰라…. 아마 그는 널 죽이려고 할 거다. 그 녀석에게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지. 기억해둬, 류. 현세에서… 인간의 몸을 빌려 녀석이 태어났다. 녀석이 가진 이 땅 위의 이름은 ‘기령’이다. 그 녀석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인간으로 살아가는 악마일 뿐이다…. 마치 내가 인간의 몸을 빌렸으나 구원자의 숙명으로 태어났듯이….」 그러나 기 역시, 왜 기령이 스스로 마계로 건너갔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류는 새삼 그것이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별 볼일 없는 인간인 자신을 왜 납치하고 가뒀는지가 궁금하긴 했다. 그런 궁금증과 갈증, 그리고 허기가 찾아올 무렵에 기령이 들어선 것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그리고, 기에게 누차 경고를 들었을 때처럼… 기령은 역시 싸늘하고 아름다웠다. 길고 검은 속눈썹이 눈 주변을 윤기나게 감싸고 있었고, 만약 그 눈동자에 조금이라도 인간의 감정이 실렸다면 누구나 혹할만큼 신비로웠다. 그러나 그 시선의 무표정과 같이 목소리마저도 감정 따위는 담겨 있지 않았다. “신부라…” 그는 성족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엄격하고 아름다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류는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성족의 전사들과 너무나 닮은 유사함에 치를 떨었다. 더군다나 기령은 류를 더욱 비웃듯 그가 입고 있던 사제복의 칼라를 끌어당겼다. “로만 칼라라…. 잘도 자신을 숨기기 위해 애 썼군, 류.” “…….” “이런 식으로 천주의 품안에 숨어 있으면서 깨끗한 얼굴로 위장을 하면…” “…….” “사실 아무도 모르겠지. 네가 어떤 목적으로 거기에 있는지를.”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류는 조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성족의 성스러운 전사 ‘기’와 쌍둥이라는 사실이 더욱 치욕스러웠다.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류는 그 정도로 인내심이 없진 않았다. 대신 얼음같이 싸늘하게 대꾸했을 뿐이다. “숨어 있었던 게 아닙니다.” “…….” “제 할 일을 하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그러자 기령은 더욱 입술을 비틀었다. 비록 그의 쌍둥이 영혼인 기가 그렇게 웃는 것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이 닮은 것만은 분명했다. “너의 일이란 결국, 신에게 가까워지고자 하는 순박한 인간들을 꼬드기는 일이지.” “… 똑같이 신의 사랑을 받았지만, 당신들 보다는 순결한 사명입니다.” 기령은 그 말을 대놓고 비웃었다. 희미한 눈웃음을 지으며 류의 로만 칼라(* 성직자들의 옷 수단Soutane 에 달린 칼라. 세속에 대한 정결과 순결을 상징한다.)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 바람에 류는 팔이 위로 들려 묶여진 경직된 상태에서 겨우 목을 뒤로 휙 하고 젖힌다. “순결?” 기령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흡혈귀처럼 웃었다. 검고 윤나는 머리카락과 무표정한 얼굴이 그렇게 보였다. “잊지 말라구, 류.” “…….” “너는 인간일 뿐이고, 나는 악마다. 네가 아무리 성족과 결부된 인간이라고 해도…” “…….” “나는 손가락 하나 깜짝하지 않고 너를 보낼 수 있다.” “… 그런 것에 무서워 할 인간이라면 기를 만나지도 않았죠.” 스물 일곱의 아름다운 청년, 류의 말에 검은 머리의 얼음 같은 얼굴이 싸늘한 웃음을 짓는다. “그렇군.” “……???” “그렇게 순결해서 나와 기를 구별하지 못했나?” “……!!!” 그것은 류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 덕분에 이렇게 잡힌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기와 기령은 다르게 생겼다. 그러나 기령은 그의 말대로 조금의 에너지 만으로 얼마든지 스스로를 바꿀 수 있는 전략가였다. 그가 어떤 힘으로 영성이 충만한 사제원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다. 마계족들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그들이 쉽게 발을 들이밀 수 없는 공간이 있는 법이다. 그 때문에 성족이나 그들을 위한 전사들은 곳곳에 진지를 마련해 놓고 있었다. 류가 숨어 있던 한국의 사제원도 마찬가지였고, 굳이 사제원이 아니라 선령이 떠도는 여염집이나 무당집조차도 그들의 보루였다. 시성한 기운은 강력한 방화벽이었다. 그런데도 기령은 태연하게 사제원을 걸어 들어와 기인양 행세하여 자신을 이 곳으로 데리고 왔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너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기’라고 불렀다.” “…….” 무표정하게 그를 쳐다보자, 기령 역시 그 강하고 서늘한 아름다움으로 응시한다. “그리고 나에게 안겼지.” “…….” 그 결정적인 한마디에 류는 조금 시선을 돌렸다. 그토록 무심하고 초연한 자신마저도 그 말에는 살짝 타격을 받은 것이다. 아이언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전설속의 잔혹한 아이언이라는 걸 알았다면 절대 그런 일이 없었다. 아니, 오직 자신의 소울메이트(soul mate)인 기였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어쩐지 그 날은 좀 이상했다. 마음만으로 묶여 있는 진정한 소울 메이트 기가 갑자기 그들의 진지 중 하나인 사제원을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인사하는 것을 마다하고 자신을 불렀으며, 검은 사제복을 활짝 펴서 자신을 무척이나 반기듯 끌어안았다. 기에게는 도통 그런 섬세한 다정함이 없기 때문에, 류는 그 때 이상하다고 알아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발 늦었다. 류는 그저 기가 보여주는 예상외의 따뜻함에 반가웠을 따름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기를 만나고 알게 된 이례 품고 있던 조금의 불경스러운 생각, 그것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두근거리던 그 심장의 박동…. 그 때 맡지 못했음이 후회되는 타락의 음습한 향기. 그저 떠오르는 것은 소울메이트 이지만, 늘 조금 먼 거리에서 느껴지던 기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는 것 뿐이다. 큰 손바닥으로 뭔가를 떠올리듯 생각에 잠긴 채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파열될 것처럼 뛰어 올랐고, 류는 무의식중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기…?’ 그리고 끝-. 언제나 영적인 순결함이 빛나던 엄격한 기의 눈동자가 갑자기 갖가지 색깔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무표정한 갈색에서 분노가 섞인 자주색으로, 그리고 만감이 교차하는 푸른 색에서 마지막으로 그 모든 색을 흡수한 검은 색으로. 정신을 잃기 전에 살짝- 얼굴 위의 손바닥이 목으로 내려왔다. 기가 나를 목조른다- 라는 섬칫한 느낌을 깨닫기 이전에 이미 눈이 감겼다. 그렇다. 그것은 평상시에 류 자신이 존경하고 동경하는 기가 아니었다. 그는 기의 쌍둥이 영혼이었으나 자신의 손으로 피 묻은 날개를 자른 반역자 아이언이었다. 그가 바로 말로만 듣던 인계의 기령이라는 작자였다. “자신이 사모하는 천사의 얼굴은 기억해 둬야지, 류.” “…….” “…하다못해 미카엘이든, 라파엘이든, 우리엘이든, 가브리엘이든… 네가 원하는 이름으로 부른다면 기는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해 줄텐데 말이야.” 얼굴을 바싹 붙인 채 조롱하듯 말했기 때문에 류는 그를 피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기와 아이언을 구별하지 못한 것은 순전히 자신의 탓이다. 그 사실을 상기 시키는 차가운 눈동자로 기령은 비난하고 있었다. “아니지… 너는 이름만 사제일 뿐이지. 사실은 숨어 있었던 거잖아, 그렇지? 너는 우리랑 같아. 신을 믿지 않지. 다만 믿도록 키워져 왔을 뿐이지.” “…….” “…그렇다면 이렇게 말해도 되겠군. 류, 네가 원한다면 기는 뭐든지 할 수도 있을 거다. 십일면보살,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 천수천안보살… 역시 다 되어 줄 수 있지.” “…….” “이왕이면 나를 부르지 그래? 나는 니들이 말하는 사탄의 편이고, 전지전능하신 신에게 도전한 루시펠도 될 수 있고, 벨제뷔트도 될 수 있고, 위리놈이나 판도 될 수 있는데 말이야. 아니지… 네가 불경하다고 생각하는 소돔의 베리알이 되어 줄까?” “…….” “…원한다면 모든 환각을 줄 수 있어. 내 형제 기의 능력과 나의 능력은 비슷하니 말이야.” 류는 정말 그가 싫었다. 아름다움이 기와 비견할 정도로 높았지만, 그 악랄한 성격과 경고들은 바 대로 잔인한 품성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절로 인상이 차가워졌다. 자신을 모욕하는 말들에, 그리고 자신이 사모하는 기를 능멸하는 듯한 말투였다. 만약… 만약에 기령이 그 순간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 그것을 듣지 못했다면 류는 그에게 한번도 품지 않은 살기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하필, 그 순간에 그가 비난하던 얼굴을 떼어내며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버릇은 못 고쳤군….” “……???” “듣기 싫은 말을 들을 때의 버릇들…” 유퍼도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하 감방의 벽에 기대어 기령의 싸늘한 독설들을 듣고 있었는데, 조금 무표정했지만 그들 무리 중에는 가장 인간 같았다. 본능적으로 류는 유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유퍼 역시 무슨 말인지 정확히 듣지 못한 눈치였다. 양미간을 조금 흐리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었을 뿐이다. 기령은 스스로 뭔가 말을 한 뒤, 이 상황이 무척 우습다는 듯 피식 한번 웃었다. 뭔지는 몰라도, 혼자 퍼붓고는 잔뜩 기분이 상한 눈치였다. 곧 그것을 증명하듯 앞으로 다가선다. 이어 가차없이, 조금 창백해진 류의 얼굴을 억지로 잡아들었다. 꽉 잡힌 앞머리 때문에 고통스러울 텐데도, 류 역시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성족조차 조금은 유혹을 느낄만한 얼굴, 그 서늘하고 초연한 얼굴을 보며 기령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기 힘든 말이었다. “왜 기를 선택했지?” “……???” 포로를 놀리듯 말하는 좀 전의 말투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잔뜩 가라앉은 어두운 기색이 그의 음성에 스며 있었다. 류는 그 순간 똑똑히 보았다. 믿기지 않게도, 스스로 마계로 걸어갔다는 이 타락한 천사의 눈동자는 지독하게 상처 입은 듯 보였다. 아주 짧은 시간, 아주 짧은 찰나에 그 느낌이 스쳐갔다. 그러나 여전히 그가 무슨 의미로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류는 깨끗한 얼굴을 들어 다소 기력이 소진한 눈동자로 기령을 쳐다보았다. 언제나 담담하던 류의 얼굴 위에 흐릿한 의문이 흘러갔다. 그리고 왜 그랬을까. 기령은 갑자기 생각에 깊게 잠긴 표정이었다. 무의식중에 손가락을 미끄러뜨린다. 섬뜩할 만큼 무표정한 시선이었지만, 그 아름다운 손가락은 소리도 없이 류의 깨끗한 얼굴을 흘러내렸다. 부드러운 눈두덩이를 지나 서늘한 콧날, 그리고 깊은 인중을 스쳐가며 말없이 닫힌 입술의 끝에 다다른다. 순간 유퍼는 ‘헉’하고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딘가 나른한 느낌이 나는 까닭이다. 기령의 표정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생각으로 잠겨 있었지만, 눈빛만은 묘하게 향수에 어렸다. 이상한 일이다. 기령이 뭔가에 대해 저렇게 길게 탐색하는 일도, 그리고 뜻없이 생각에 잠기는 일도 없었다. 인간에게 관심을 가진 일도 없었다. 그는 늘 이용할 가치가 있는 자들과 없는 자들로 철저히 구별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류 역시 놀란 게 분명했다. 쉽사리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조금 불편한 듯 묶인 손을 뒤척거렸다. 쨍그랑 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간간히 울리는 감옥에서 기령은 철저히 자신만의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지….” 이 역시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기령은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짧은 단도 하나를 꺼내들었다. “……!!!” 놀란 유퍼가 미처 말리기도 전에 단도를 쥔 손이 높게 올라갔다. 기령이 순식간에 류의 눈을 찌를 듯 칼을 쳐 든 것이다. 그러나 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는 신의 사람 답게 무장한 정신으로 담담히 그 칼 끝을 노려보고 있었다. 안돼… 라고, 유퍼가 순간적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 칼 끝이 내려갔다. 한 손으로 류의 턱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칼을 내리 꽂던 사내가 기어이 일을 벌인 것이다. “……!!!” 그러나 유퍼가 본 것은 피투성이 류가 아니었다. 눈 사이 미간을 찌를 듯 힘차게 내리 꽂던 칼은 벽에 붙어 있었다. 칼을 잡은 기령의 손이 벽에 묶인 류의 손바닥을 감싸고 있었다. 결국 찌르지 않은 것이다. 대신… 놀랍게도 기령은 그에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키가 큰 류보다 조금 더 큰 키, 고개를 약간 숙이고, 류의 턱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주어 거세게 잡아당겼다. 유퍼는 온 몸이 굳어버렸다. 이 순식간의 행동에 놀란 것은 류도 마찬가지였다. 여간해서 감정이 담담한 그 조차도 놀란 나머지 얼어붙었다.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단호한 입술이 내려왔을 때는 실감도 나지 않았다. 분명히 쳐든 칼 끝만 보았는데, ‘죽는다’라고 생각한 후에 곧바로 얼굴을 덮는 뜨거운 숨결만 느꼈다. 분노한 듯 거칠게 들어오는 혀 끝이 칼만큼이나 날카로웠다. 키스라고는 한번도 해 본 적 없는 스물 일곱의 성스럽고 순결한 청년, 제류…. 그 경험이 이렇게 충격적으로 찾아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는 조금 알 수 있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뜨거운 기운… 류 자신이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고조가 전달 된 것이다. 어쩌면 나를 이용해서 성족의 정보를 빼내려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령의 감정이 전달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은, 왜 그가 가진 감정들이 팍팍하고 건조한 분노와 증오로 뒤범벅된 정열… 이런 생소한 감정인가 하는 점이다. 류가 아는 한, 마족이라는 녀석들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족이 가질 감정은 더더욱 아니었다. 한 때 천계의 대표적인 계급자였다는 아이언…. 그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다. 거친 혀는 정신을 유린하듯 입술을 벌리고 들어와 류의 입 안을 함부로 맴돌았다. 숨이 턱 막히고, 타액이 넘칠 듯 섞여 버린다. 희미한 저항의 소리가 목 너머에서 막혀 버렸다. 며칠간의 굶주림은 이상한 방식으로 희미해져갔다. 갑자기 눈 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혹독한 입맞춤이다. 마치 영문도 모르는 자신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듯한 날카로운 키스였다. “…하…”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가는 한숨이 토해졌다. 막혀 있던 숨덩이가 튀어 나온 것이다. 눈앞의 잘생기고 엄격해 보이는 사내 역시 조금 기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여전히 한 손은 자신의 턱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묶여 있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멍하게 눈을 맞추고 몇 초가 흘렀다. 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방금 전에 뭔가 타는 듯 입술로 남겨진 흔적만이 생생했다. 문득 갈증이 나는 상황에서 더욱 목이 마르고 입술이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무의식 중에 혀 끝으로 입을 축인다. 팽팽한 긴장감을 누그러뜨리는 그 행동에 기령이 희미하게 뒤로 물러섰다. “… 무슨 짓입니까….” 비록 잡혀온 자 이나, 엄연한 인간이다. 마족이나 성족이나 모두들 인간에게 대하는 태도는 그다지 무례하지 않다는 게 정설이다. 기령 역시 마족의 우두머리 중 하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예의로 대한 것이다. 그가 기의 형제라는 점에서도 역시 그랬다. 그러나 조금 전의 기령이 보인 행동은 이해하기 힘들고, 그만큼이나 혼란스럽다. 단지 자신의 몸을 이용해서 성족들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라면 더 나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류는 다른 점을 깨달았다. 뭐라고 설명할 길은 없지만, 기령이 보인 감정은 굉장히 낯설었다. 그렇게 폭주하는 듯한 감정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러니 굉장한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 동요가 되고 만 것이다. “류….” 더군다나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예상치 못하게 작은 한숨이 느껴졌다. 그는 그럴 영혼도 아니다. 물론 그 표정이나 이상한 느낌은 짧은 시간 사이에 사라졌다. 기령은 단도의 끝을 내려 류의 턱에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처음 잡혀 왔을 때 본 그 싸늘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말했다. “나를 기억해 내라.” “……???” “… 그럼 너의 기를 살려준다.” 눈을 몇 번 깜박이며 그 말의 뜻에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기령은 벌써 등을 돌렸다. 모르긴 해도 그는 난폭하다는 소문만큼 성질도 급한 것 같았다. “유퍼.” 유퍼라고 불린 사내가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넘기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나가려는 기령이었다. “류를 풀어주고 내실로 모셔라.” “…네.” 여전히 소리없이 걸어나가는 기령의 등 뒤에서 유퍼가 주저거렸다. “……아이언 님…” 그러나 기령은 유퍼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곤란한 표정의 유퍼가 다가와 류의 팔을 풀어주었다. 곧이어 몇 사람이 더 들어왔다. 그들은 표정이 없는 면에서는 죄다 비슷했지만, 귀찮아하는 표정으로 류에게 물과 음식을 내밀었다. <신성모독(神聖冒瀆) 3.> 태초에 빛이 있었다. … … … 기가 도착하는 순간, 작은 수도원에서 바람이 일었다. 놀란 수도사들과 사제들이 머리를 숙이며 바쁘게 걸어 나왔다. 그들은 오늘 기가 왜 찾아왔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처럼 보였다고?” 수도원에서 종신서원을 하는 자들 중에 특별히 선택받은 자들만이 기를 만날 수 있었다. 기의 존재나 영적 전쟁은 일반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는 비밀 중 하나다. 종교적인 내용은 문화마다 차이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 신성한 자들만이 기의 수하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류와 마찬가지로 이 곳에서 정보원의 역할을 하며 보호 받는 것이다. 그런데 기가 특별히 아끼는 류가 사라졌다. 그것도 며칠 전 나타난 기를 닮은 사람에게…. “정확히 기 님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기의 조용한 한 마디에 수사 중 하나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들로서는 기와 류에 얽힌 관계를 면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짐작만 할 뿐이다. 아무튼 기가 류를 특별히 아낀다는 것은 그의 미묘한 태도로 알 수 있었다. 그런 류가 사라졌으니 그들은 다소의 두려움을 느끼고 말았다. “나와 닮은 자라….” 기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탄식처럼 속삭였다. 어리둥절한 부하들과 수하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잠시 입술을 깨물며 생각에 잠긴 기는 이전의 그와는 달라보였다. 이지적인 성스러움이 가득 담긴 눈동자는 그가 실제로 천계에 있을 때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짐작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너무나 엄격한 그의 정제된 성격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안절부절하는 마음으로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이 곳에서 류와 가장 친한 자가 누구였지?” 그러자 다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수사 중에 하나가 초조한 듯 손가락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류의 옆 방에 기거 했던 치유라는 청년 입니다.” “우리에 대해 알고 있는가?” “류와 친했던 만큼… 어느 정도는…” 기는 다시 나지막히 한숨을 쉬며 수사 중 하나에게 짧게 명했다. “그를 데려 와.”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 더 당황 한 듯 서로 얼굴만 쳐다봤다. 용기를 내어 말문을 연 자는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나이 든 사제 였다. “하지만 기 님…” “……???” “… 치유를 어디에 쓰시려고…” 기는 넥타이 매듭을 풀며 다소 나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일상적인 인간처럼 보이고, 그렇게 해 다니는 그들이었지만 분명 다른 느낌이 난다. 사제는 고개를 들어 그를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나 기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강해 보였다. 그는 정갈함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더욱 거리감이 들게 만들곤 했다. 그러니 치유라는 청년은 더욱 안 된다. 그는… “그 녀석이라도 동반자 삼아서 류를 찾아와야지.” “……!!!” 수사들은 눈에 띄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치유는 기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류와는 전혀 다른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 “아무튼 제가 왜 당신을 따라갑니까?” 치유는 역시 그런 인간이었다. 기는 이 피곤한 청년을 상대할 생각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입가를 엄격하게 굳혔다. “너의 친구이자 나의 부하인 류를 찾으러.” 간단한 대답에 치유는 짜증스럽다는 듯 의자에 기댔다. 고급스러운 차가 조용한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도로를 달렸다. 낯익은 인간들의 골목과 가게들이 지나쳤다. 그들은 자신들의 임시 숙소로 잡은 건물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간간이 천계에서 들어오는 채널링(*교신)에 답하며 기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치유는 류와 같은 스물 일곱의 멋진 청년이었다. 어딘가 도전적인 눈빛에 예민한 턱 선을 지닌 녀석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은 부드러운 류의 머리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체격과 키도 훤칠하게 더 컸다. 언제나 깨끗하고 조용해 보이는 류와는 전혀 달랐다. 이런 녀석이 가장 친했단 말이지…. 기는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치유는 사제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절차에 따라 독실한 종교 집안에서 자란 류와는 천지 차이였다. 한마디로 말귀는 통하고 내용도 알아듣고 있지만,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성격이었다. “류는 당신들이 천사라고 쉽게 설명했지만, 나는 믿을 수 없는 걸요.” 더군다나 꼬치 꼬치 따지기도 좋아하는 성격이다. 귀찮은 녀석이군…. 기는 표정없이 대답했다. “우리는 각자의 문화에서 각자가 원하는 모습, 믿는 모습으로 보인다. 때로는 천사, 신령, 요정… 그 무엇이든 선한 것들의 편이지. 우리들의 절대 신념은 선(善)이다.” “… 한마디로 제가 천사를 믿은 적이 없다는 말씀이군요. 착하지도 않구요.” 그래도 제법 머리가 똑똑한 녀석이다. 류가 가진 능력이 없을지는 모르지만,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꿰뚫어보듯, 녀석은 비 내리는 차창을 바라보며 계속 투덜거렸다. “오래전부터 궁금했는데…” “…….” “…왜 그렇게 류에게 집착하는 겁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믿지도 않는 천사라고 속이는 것도 그렇고…” 속인다라…. 기는 살며시 웃었다. 원체 잘 웃지 않는 성격이지만, 치유의 풋풋한 모습이 뭔가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네가 만들기 나름이다.” “……???” 투덜거리면서도 궁금한 시선이 이 쪽을 향한다. 기는 느긋하게 차 의자에 기대었다. “쉽게 설명하면… 류는 나의 소울 메이트다.” “…….” “…그리고 그런 류를 납치해 간 녀석은 오랫동안 분노와 상처로 무장한 내 형제 아이언이지.” “형제라면서요? 같이 큰 날개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존재 아닙니까?” 어쩌면 치유라는 청년은 그 도발적인 얼굴답게 마족에 어울릴지도 모른다. 기는 그런 생각들로 류에 대한 걱정을 식히려 애썼다. 류에게는 아직 말하지 못한 비밀들이 더 많았다. 그러나 치유라는 청년은 처음부터 자신과 그다지 연관이 없기 때문인지, 오히려 편하게 입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래, 형제지. 과학에서 말하는 입자(particle)와 반입자(antiparticle)처럼 쌍으로 이뤄져 있지.” “짝…입자?” “그래, 거의 그런 개념이야.” 또한 믿기지 않지만 이 청년은 신학이나 문리보다는 과학에 명석해 보였다. 기는 특이한 마음이 조금씩 일기 시작했다. “거울처럼 서로를 대립해서 비추는 힘의 균형이야. 나의 형제 아이언은 나와 같은 짝으로 태어나기 이전에는 나와 하나였다.” “… 어려운 말이지만… 제 똑똑한 머리로 이해하기엔, 두 분이 같은 사람…, 아니 같은 영혼이었다는 말입니까?” “그래. 원할 때 분리될 수 있고, 원할 때 다시 태어나거나 다른 계로 넘어갈 수 있으며, 원할 때 합치될 수 있다. 그게 영혼들의 특권이야. 원자들의 특권이기도 하지. 과학을 배웠다면 알 수 있을 거다.” “그럼 사람들도?” “사실은 사람들이 그런 거다. 영혼은 진흙처럼 나누고, 합치고, 떠나거나 머물 수 있다. 하나가 둘이 될 수도 있고, 둘이 하나가 될 수도 있지. 단,… 사람들이 그들이 집단으로 원해서 만든 3차원 계에서는 특히 그래.” “우리가 우리의 생존방식과 지구를 선택했다는 말인가요?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설명하자면 그런 개념이지. 너희들은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고, 유를 다시 소멸시킬 수도 있고, 시간을 무시한 채 재창조 하거나, 시간 자체를 없애 버릴 수도 있지. 우리들조차도 너희들이 만든 강력한 집단 환각과 환상, 믿음에 의해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야. 너희가 어떤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하면, 그건 어디선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랫동안, 그리고 가속화 되고 많은 사람이 진심이라고 믿으면 그런 환상이 점점 더 현실화 되어 가고….” “…뭔가 상상하면 만들어진다라…” “너희 세계의 위대한 과학자, 아이슈타인이 말했지. E=mc² … 물질은 에너지로, 에너지는 물질로 바뀔 수 있다. 정신 에너지도 마찬가지야. 강력한 염원은 강력한 물질을 만들어 내. 다만, 그 개념 안에 공식 안에도 나오는 c, 즉 ‘빛의 속도’라는 시간의 차원이 들어가야 하지. 시공간이라는 말은 그래서 너희가 물질로 인식하는 3차원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개념이다. 대신 인간은 강력한 염원이 있다면 시간을 들여서 그것을 물질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자 치유는 곧 포기한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어렵게 말고 쉽게 좀 말해봐요.” 아무도 자신에게 이렇게 버릇없이 말한 적은 없었다. 기는 조금 더 엄격하고 차가운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쉽게 말하면 아주 간단하다…. 사실은, 인간은 눈으로 인지하는 세계 말고도, 상상하는 모든 세계를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 “원래 전 우주상에는 단 하나의 에너지만 존재했다. 모든 생명은 분류되지 않고 단 하나였다. 태초에는 아무 것도 없었지, 완벽한 하나 외에는…” “그런데?” “그러다가 그 하나인 전부는 완전한 일치감, 교감, 충만감에 가득찼지. 그 에너지는 긍정적인 에너지였고… 마치 물이 끓어서 내는 연기가 온 방안을 채우듯, 퍼져 나가는 연기였다.” “…그래서?” “결국 합일된 에너지들은 기쁨에 겨워 쾅- 하고 터진 거야. 양(陽)의 에너지였기 때문이지. 그것이 빅뱅(big bang)이었다. 그 이후에 혼돈(chaos)이 찾아왔고.” “빅뱅… 선생들이 말했죠. ‘태초에 빛이 있었다…’라고.” 기와 치유를 태운 자동차가 하얀 건물 앞에 도착했다. 눈이 부실 정도로 깨끗한 건물이었다. 치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이 곳에서, 이 번화가에, 사람들이 그토록 많이 오고가는 도심지 한 가운데에, 그 철도길 건너 창녀촌이 있는 이 곳에… 언제 이런 건물이 있었던가- 라고. “빅뱅(=대폭발) 다음에는 어떻게 된 건가요?” 건물 앞에 내리자, 하얀 스웨터를 입은 정갈한 청년 기는 먼저 걷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잘 모른다면, 그냥 TV에나 나오는 잘생긴 연예인 정도로 보일 외모였다. 긴 다리로 성큼 성큼- 치유는 거추장스러운 사제복을 거머쥐며 가까스로 그를 따라다녔다. 하얗고 멋진 복도를 지나자 창이 넓고 큰 방이 나왔다. 치유가 기와 함께 들어선 곳은 그 방이었다. “대폭발 다음이라… 글쎄, 뭐가 있었을까….” “……???” “흩어졌겠지. 모든 것이 조각나서 원래 하나였던 위대한 에너지는 수 억 가지의 파편으로 흩어졌겠지.” “…인간도 거기서 나왔단 말이군요. 무(無)에서 유(有)로? 우리들은 결국 창조신의 에너지 조각들이다…. 뭐, 이런….” “사실은 인간들이 가장 창조신과 닮은 존재들이다. 인간들이 뭔가를 상상하면 새로운 계가 우주에서 탄생하지. 신성계도, 마계도, 환생계도 모두 그렇게 탄생했다. 인간으로부터 나왔기에 부분적으로 미완성인 채로… 그러나 인간으로부터 시작했음에도, 인간보다 더 힘이 강해진 것이지.” 치유는 기의 말에 잠시 가톨릭의 성녀 카타리나가 했던 기도를 떠올렸다. 『영원하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의 본질 안에서 나의 본질을 인식하겠나이다.』 그러자 그다지 모범적이지 않은 스스로가 자각되었다. 그는 남모르게 혼자 쑥스러워졌다. 마침 그 때 누군가 차를 내왔다. 향긋한 박하향이 나는 차였다. 치유는 그 쯤에야 찻잔을 노려보며 다시 ‘류’에게 집중했다. 절친하던 류는 도대체 이 곳에 몇 번이나 왔었던 것일까- 라고. 항상 이 남자, 훤칠한 체격에 서늘하고 엄격한 인상, 그러면서도 어딘가 기품 있고 은은해 보이는 잘생긴 남자는 류만을 찾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은 자신이 ‘딱 걸렸다.’ 재수가 좋을지 나쁠지는 두고 봐야 알 것 같다. 자신이 천사라고 우기는 정신 나간 청년 ‘기’가 차를 따랐다. “…치유…” “…듣고 있어요.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마십쇼.” 치유는 건방지게 걸터앉으며 갑갑한 로만 칼라를 젖히고 한숨을 쉬었다. 퉁명스런 말투에 비로소 그가 웃는다. “…어떻게 설명해도 직접 겪지 않는 이상은 믿지 못할 거다.” “…아마도요.” “어쨌든 류도 그랬으니, 너도 마찬가지겠지. 결국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계를 둘러싸고 있던 세 개의 큰 세계, 신성계, 마계, 환생계가 최초에 있었다는 거다. 아주 오랫동안 인간계와 나머지 세 개의 세계들은 서로 공존해왔다. 그러다가 마계가 반역을 했고…” “… 루시펠이 신에게 반역했듯이…” “… 그래, 그 말이다. 그렇게 한번 봉인 되었던 마계가 너희들의 전생에서 풀려났다. 지금은 마계의 봉인을 풀었던 아틀란티스 인들이 환생한 세대들이다.” “… 모두?” “… 대부분이…. 그리고 전생에서의 카르마(*업)을 그대로 되물림하고 있다. 내가 구원자로 내정된 신성계와 류를 납치해 간 마계가 인간계를 두고 싸우고 있는 거지.” “휴~ 오케, 오케. 거기까지! 이건 마치 영화 매트릭스 같아요.” 마침내 치유는 큰 숨을 내쉬며 편하게 등받이에 기댔다. 매트릭스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주인공 네오가 두 개의 약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사실은 살아오던 모든 것이 환상이고, 실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는 그 순간의 말들이 지금과도 비슷했다. 치유는 이런 상황에서 우습게도 그 영화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뭐, 실제로 자신은 키아누 리브스 정도의 외모는 되니 상관없다. “…그럼… 당신은 인간이 만들어 낸 신성한 영역의 사자인가요?” “그래. 쉬운 말로는 그래서 천사라고 말하지. 아무래도 그 단어가 지구상에서 가장 넓게 이해받는 편이니….” “…그럼 당신들이 싸운다는 반대편은?” 기는 그 부분에서 아련하게 웃었다. 뭔가 떠올리는 듯한 미소였다. 이 젊고 아름다운 청년은 창가에 서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보기 시작했다. 그쯤에 치유는 그가 도대체 언제 대답해 줄지 궁금해졌다. 물론 그 대답은 곧 이어 들을 수 있었지만. “우리가 싸우고 있는, 영적 전쟁을 벌이는 반대편은 바로 악마다. 마족이라고도 부르고, 타락한 천사들이라고도 부르지.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어.” “…그렇겠군요. 사실 이름이나 개념 따위는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르죠…. 단지 당신들이 인간들의 가장 선하고 신성한 부분으로 이뤄진 영혼 에너지라면… 반대편은…” “…반대편인 마족들은 인간들이 스스로 가장 감추고 싶어하는 감정과 본성들을 담아 놓은 영혼이지. 인간들은 그 모든 증오, 분노, 상처, 그리고 삐뚤어진 집착, 그런 것들을 감추려고 애썼다. 신의 그늘 아래에서… 절대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결국 그 광대한 에너지는 풀려 나갈 곳을 찾지 못하고 음(陰)의 에너지를 만들었지. 증폭된 에너지는 곧 마계를 만들었고, 지옥과 염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족들, 악마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그들, 마족들은 스스로가 타락한 게 아니라,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들은 인간의 역사에서 계속 부정당했어.” “…인간이 가진 두 개의 본성, 그것이 강력한 에너지로 쌓이고, 결국엔 실제로 존재되어 지고…. 그 이유로 당신과 당신의 적이 인간의 세계에 태어났고… 그것을 만들어 낸 인간조차도 손 댈 수 없는 전쟁으로 치달았다- 뭐, 이런 말씀이군요….” 치유에게 그 이야기는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같았다. 한 영혼이 지닌 두 가지 면…. 분명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선의 에너지도 강력하고 타락의 에너지도 강력하다면… 인간의 세대가 거듭될수록 두 영혼 간의 치열한 영역 다툼도 심해질 것은 자명하다. 실제 인간들도 그렇기 때문이다. 그는 잠시 골치가 아파왔다. 기가 하는 말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할 여력도 없었다. 그저 서늘한 손을 올려 이마를 짚어 본다. 피부가 뜨겁다. 그 상태로 몇 분인가 빗소리와 기의 뒷모습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다, 그들이 왜 여기에 있는지가. “아, 맞다!!!” “…….” “…우리는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지 않습니까? 제 친구 류는 그래서 그들 마족들에게 잡혀갔다는 말씀인가요?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그거 아니였나요?” 어쨌든 치유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될 기분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지킬 박사도 하이드도 필요없었다. 그는 류만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류는 그에게 특별하고 만족할만한 인간이었다. 이상한 나라에 들어온 앨리스같은 이 기분은 역시 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류만 돌아오면 자신은 다시 평범하고 다소 불량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류는 나의 소울 메이트고, 나는 류의 수호 천사다. 단지 이번 생애에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났지. 특별한 사명 때문이다….” “…알겠어요. 쉽게 설명하면 그렇단 말이잖아요.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치유가 손을 휘휘 저으며 너스레를 떨자, 기는 다시 밝게 웃었다. 빗소리만큼 맑은 웃음이다. 적어도 그는 이제 치유에게 더 이상 낯선 존재가 아니었다. “치유… 너의 친구 류는…” “……???” “… 예언의 능력이 있다. 미래를 예지하는 힘이지. 그 자신은 아직 모르겠지만, 류는 전생에서도 중요한 사람이었고, 현생에서도 마찬가지야.” “…그럼 당신의 형제라는 마족이 류를 훔쳐간… 아니, 납치한 건, 그런 능력 때문이라는…?” 아주 단순하고 유추하기 쉬운 질문이었다. 치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게 여기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질문에 기는 고개를 저었다. 짧게 두 번, 그리고 보다 단호하게 한번. “아니.” “……???” “…나의 형제인 아이언…, 아니 기령은 류를 죽일 거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가졌든 기령과는 상관없을테니…. 실제로 류는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 내가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셈이지. 기령 역시 그가 예언자이든 뭐든 상관없을 거다.” “……??!!!” “기령은 전부가 아니라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아. 녀석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되건, 마족이나 성족이 어떻게 되건 전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류를…” “녀석이 이번 생애에서 인간의 몸을 빌려 환생한 이유는 오직 하나다. 류를 없애기 위해서지…. 그걸 위해서 마계로 간 것이고…. 아마도…” 기의 눈동자가 조금 씁쓸해졌다. 그는 마치 치유의 존재를 잊은 듯 혼자서 뭐라고 중얼거렸다. “아마도… 죽이지 않으면 못 견디기 때문이겠지….” 뭔가를 회상하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초연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치유는 믿음의 형제인 류에게서도 비슷한 기운을 몇 번이나 느꼈었다. 특히나 류가 자신의 꿈에 대해 설명할 때는 더욱 그랬다. 류의 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주로 짙고 푸른 강과 기암절벽들, 그리고 노를 젓는 사람과 류 자신의 이야기로 끝이 났었다. 류는 어릴 때부터 그런 꿈을 곧잘 꾸었는데, 막상 꿈에서 깨고 나면 심장을 움켜쥘 듯한 통곡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금 기가 짓는 표정이 그 꿈을 설명할 때의 류와 닮았다. 치유는 조금 멍하니 그를 보고 있었다. 반짝- 닫힌 속눈썹 사이로 미묘한 웃음을 띠며 기가 고개를 들기 전까지는…. “기령은 류 때문에 천국을 떠났다. 낙원에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걸어 나갔지.” “……!!!” “그 녀석은 스스로를 추방시켰다. 선악과나 자만심 같은 건 하나도 필요 없었어. 간단했지. 그는 천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니….” 기의 눈빛이 류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치유는 그의 말이 주는 놀라움과 상관없이 고개 돌렸다. 그런 눈동자를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왠지 불순한 기분이었다. <신성모독(神聖冒瀆) 4.>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또한 사제와 함께. … … … … 류는 침착했다. 그 이유로 인해 유퍼는 류에게 관심이 많았다. 굳이 기령 때문이 아니어도 류라는 인간이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만큼 류에게는 뭔가가 있었다. 그가 인간들의 에너지 공명, ‘아카샤’를 조절하고 접근할 힘이 있든 없든 뭔가 베일에 싸여 있었다. 유퍼가 마침 기의 접근에 대한 보고를 들었을 때, 류는 건물 계단에 앉아 있었다. 이제야 비교적 행동이 자유로운 그가 이 곳에서 유일하게 좋아하는 장소였다. 계단에는 이 건물의 단 하나뿐인 창문이 있었다. 그들이 기거하는 곳은 마계의 통로이기도 했고, 주변으로 가득한 음기(陰氣)가 에워싸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일반인들은 함부로 접근하기 힘들었다. 인간이 섣불리 들어섰다가는 이 건물이 남긴 험한 혼령들, 즉 부정적 음의 에너지들을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귀신 나오는 건물이다. 사실은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사거리의 골목이기도 했지만, 그 음습한 기운은 본능적으로 인간의 접근을 막았다. 낡고 오래된 1930년대식 건물, 그 자체가 이미 결계였다. 흉물스러운 외관과 더불어 강력한 아우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류는 태연자약했다. 아니, 태연하다기 보다는 좀 무심해 보였다. 그는 붉은 카펫이 깔린 건물 안 쪽의 그나마 가장 밝은 곳에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유퍼는 저도 모르게 그의 행동에 이끌리고 말았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류처럼 생명력 있게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유일하게 햇볕이 드는 곳이죠.” 자신의 목소리에 깨끗한 눈동자가 이 쪽을 향한다. 아무런 사심도 담기지 않은 시선이다. 그가 기의 진짜 예언자라는 것을 직감하게 만드는 눈길이다. “어제 기령이 했던 말이 뭔가…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약간의 기도와 함께…” “그래서 당신에게만 신성함이 느껴지는군요….” 마치 개화기를 연상시키는 이 고전적인 장미 벽지, 그 얼룩한 자국 아래에서도…. 류가 앉은 계단 끝 쪽에는 벽으로 막혀 있었다. 코너였던 셈이다. 그 벽에 기대어 그를 바라보자, 류는 조금 피곤한 듯 목덜미를 툭툭 두드렸다. “저는 아이언… 기령님을 모신지 십년이 훨씬 넘었습니다. 그가 아주 꼬마였을 때부터 모셨죠.” 류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저 정갈한 신부복을 입은 채로 마치 그림처럼 계단에 앉아서 창 밖만 내다보았다. 유퍼 역시 상관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가지고 있다면, 유퍼 자신에게도 사명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명이 기령을 지키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유퍼는 ‘인도자’였다. 그는 예언을 하거나 주술을 할 능력은 되지 않았지만, 길을 먼저 안내하는 인도자의 역할이었다. 그리고 곧 이어 류를 데리고 ‘주술자’에게로 가야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류가 주술자를 만났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가 궁금했다. 지금까지의 류는 대부분 평온하고 초연한 표정이었다. “사실… 아이언님이 그렇게 뭔가에 관심을 갖는 것은 처음 봅니다. 하물며 인간에게는요.” 그러자 류가 다시 깨끗한 시선으로 이 쪽을 응시했다. “저를 잡아놓는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기의 편이라면… 저를 죽이거나 소멸시키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 역시 초연하시군요. 인간이라면 죽는 것을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신의 것은 신에게로,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로. 신의 사람이라면 하늘의 뜻대로. 피할 수 있는 잔이라면 내게서 거두고 싶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 유퍼는 저도 모르게 잠깐 얼굴을 돌렸다. 인간 대 인간- 그것이 이상하게도 생소했다. 기령과 함께 한 이례로, 늘 마주치는 것이 사악한 혼, 떠도는 영이었다. 그런데 이 곳에 뭔가 어울리지 않게, 혼자만의 깨끗함으로 정결한 표정의 사내가 앉아 있는 것이다. 유퍼는 잠깐 마른 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당신을 잡아두는 이유는… 글쎄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에게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도 기에게 들어서 알고 있으리라 여깁니다.” “…….” “… 당신 이전 세대, 제 12세대의 말기에 아주 위대한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인간들이 ‘아틀란티스’라고 부르는 그 세대 때에 중립이었던 인간은 마계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 때 성족의 위대한 예언자가 말하길… 다음 세대, 제 13세대 인류… 그러니까 지금의 인류를 가지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가 필요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는 13세대까지의 전투에서 누가 승리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성족이든 마족이든 이 여섯 가지가 필요하다고만 말했습니다. 그 여섯 개의 영혼이 모이면, 인간에 대한 예언이 담긴 예언서를 열어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책을 먼저 열어보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 “그 여섯 가지는 절대 선, 절대 악, 예언자, 주술자, 인도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치료자… 입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요소는 모두 중립에게서 나옵니다. 수 십 세대를 걸쳐 환생하며 서로 인연으로 엮이고 단련된 영혼만이 이 네 가지 중에 하나가 됩니다. 절대선과 절대악은 각각 마족과 성족의 영혼을 그대로 가지고 인간의 몸만 빌려 태어나는… 초인간적인 존재입니다. 기가 그렇고, 기령도 그렇습니다.” “…….” “결국 모두가 자신에게 맡는 자리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13세대 인류가 시작된 50억년 가까이, 몇 백번이나 환생을 거듭해서 영혼은 강화되었습니다. 마치 연극 무대처럼… 이제 시간과 공간이 무대를 마련했고, 처음에는 미숙했던 절대선도, 절대악도, 그리고 나머지 네 개의 요소들도 갖춰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선으로 ‘기’를, 그리고 절대악으로 ‘기령’을, 인도자로 저를, 또한…” 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퍼는 한결 심장이 가벼워졌다. “신의 섭리가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지내온 결과…” “…….” “… 당신이 그 ‘예언자’입니다, 류.” 그러나 아쉽게도 류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을 뿐이다. “나는 그냥 평범한 청년입니다, 유퍼.” 유퍼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부른다는 걸 깨달았다. 이상하게도 그가 뭔가를 부르는 힘이 느껴졌다. 잠시 숨을 들이켜야만 했다. 조용하고 깨끗한 얼굴…. 그러나 어딘가 먼 세상 사람처럼 초연한 표정으로 류는 중얼거렸다. “예언자라…. 하지만 난 아무 능력도 없는걸요.” “…….” “…어릴 때부터 독실한 종교가의 집안에서 태어났고… 남들보다 신의 세계에 심취해서 왕따도 당해보고…” “…….” “… 귀신이 씌였다는 이유로 호되게 나무람도 당하고…” “…….” “…신부복을 입고 있지만, 사실 신부도 아니고… 그냥 기가 말하길, 내가 거기에 숨어 있는 게 좋다고 하니까 거기 있었던 셈이고…” “…….” “… 뭔가 예언 비슷하게 해 본 적도 없는걸요.” 유퍼는 류의 음성을 흘려들으며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었다. 창가에 턱을 괴고 혼자 중얼대는 모습은 흡사 놀러라도 온 사람 같았다. 그는 짧은 헛기침으로 류의 신경을 되돌려 놓았다. “나에게는 당신이 예언자이건 아니건 상관없습니다. 이 세대의 준비된 예언자가 아니라면… 당신이 아틀란티스 시대에서 돌아 환생한 예언자가 아니라면… 설령 예언자라고 해도…” “…….” “…어차피 당신은 기령에게 죽습니다. 그가 당신에게 가진 이유 모를 집착이 끝나고 나면요.” “……!!!” “그는 지금 잠시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어떤 점이 최초로 기령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어쩌면 당신들만이 관련된 전생 탓인지도 모릅니다.” “…….” “그러나 그 기간이 지나면, 기령이 난폭한 변덕을 부리게 될 때… 당신도 기도 없어집니다. 함부로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기가 당신을 아끼고, 당신이 기를 동경하는 것만큼… 기령의 알 수 없는 분노도 거대합니다.” “…….” 아주 잠깐, 류의 표정이 흐려졌다. 살짝 어두워지는 양미간이 고뇌를 나타냈다. 그는 유퍼의 말을 모두 이해하거나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기’가 없어진다는 마지막 말에 크게 동요하는 표정이었다. 유퍼는 자신에게 기령이 중요한 존재이듯, 방식은 다르지만 류에게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그러나 류의 경우는 신성함을 동경하는 순결한 정신에 가까웠다. ***** 류는 유퍼가 마련해주는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가 자신들의 ‘주술사’에게로 찾아간다고 말했을 때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유퍼가 설명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은 쉬웠는지 모른다. 다만 걱정인 것은, 기가 자신을 찾기 위해 이 곳으로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 뿐이다. 자신은 어떤 예언자도 아니다. 기와 기령은 각각 절대선과 절대악으로 자라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틀렸다. 류는 불안할 때마다 하는 기도를 중얼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기나 기령이 초인간인지 천사인지 악마인지… 그런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기가 다치거나 죽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기령이 그런 자신의 표정을 힐끔 바라보았다. “유퍼.” 그리고는 다시 차갑게 고개 돌리며 유퍼를 찾았다. 유퍼는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누가 류를 데리고 오라고 했지?” 류는 다소 황당한 기분이었다. 쓴 미소를 지으며 유퍼를 쳐다보자, 이 곳에서 가장 자신에게 관대한 젊은 인도자는 잘생긴 얼굴로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주술자가요.” “…….” 유퍼의 한마디에 기령은 입을 다물었다. 류는 저도 모르게 살짝 웃었다. 유퍼는 상냥하고, 잘생기고, 호감어린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절대 웃지 않았다. 그는 무덤덤하게 기령의 모든 명령을 수행했지만, 결정적일 때는 기령을 한마디로 제압하는 힘도 있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류는 그런 유퍼가 좋았다. 그가 인간성을 잃지 않으면서 왜 마계를 위해 일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유퍼도 그 일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그 상태로 줄곧 아무 말 없이 차만 몰았다. 류는 익숙한 도로들과 건물들을 보았지만,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그들이 향하는 곳은 겉보기와는 다른 곳이다. 그들이 요지로 삼고 있는 건물만 하더라도 겉에서 보기에는 낡고 오래된 건물일 뿐이니….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서울 근교의 한적한 산속이었다. 푸른 기와지붕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마당도 있고, 돌담으로 참새들이 앉아서 울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깨끗하고 묘한 한옥이었다. 그곳의 마루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들어서자마자 후각을 유혹하는 은밀한 먹 냄새… 남자는 한지에 먹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어딜가도 익숙해지지 않는 풍경이다. 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마족들이 있는 곳이 인간들에게는 1930년대를 떠올리는 건물이었다면, 지금 그들이 들어선 곳도 비슷한 시기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러나 적어도 흰 옷을 입은 남자는 현실의 인간이 맞아보였다. “중립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류.” “……???” 하얀 옷의 사내는 밝게 웃으며 유퍼에게 뭐라고 말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낯선 이방인의 말이다. 유퍼 역시 표정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사내는 자신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한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유퍼와 기령을 돌아보았다. 기령은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탄탄한 등은 침묵하는 자세로 돌담 너머를 보고 있었다. 오직 유퍼만이 자신을 향해 사무적으로 말했다. “우리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 “… 저 주술자는 중립입니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따르지 않습니다. 성족의 편도, 마족의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보기도 힘듭니다. 태어나긴 했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기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당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당신과 동행할 수 없는 경계선이 여기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자유의지, 그러니까 중립의 의지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 “…마치 강물과 같죠.” 그의 설명에 혼자서 들어서던 류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유퍼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던지 말, ‘마치 강물과 같죠’ 라는 한마디가 은근히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그러나 동요하지 않고 조용히 뒤 돌아보자, 유퍼는 별 말 아니었다는 듯 벌써 등을 돌리고 있었다. 한가로운 마당에 기령과 유퍼가 서 있었다. 햇볕이 쏟아지는 그림같았다. 너무나 정적인 마당이었다. 그런 수묵화 같은 장면 속의 악마와 그의 추종자라… 어딘가 정말 매치되지 않는 기분이다. 다만 한가지만은 분명했다. 아까부터 울고 있던 참새는 기령을 보는 순간 모두 떠나버렸고, 작은 개집 안의 개는 끙끙거리며 숨어버렸다. 류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침착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주술자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섰다. ***** “…참으로 오랜만입니다, 류.” 놀라운 것은, 그가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알아봤다는 점이다. 류는 눈을 깜박이며 조용히 되물었다. “저는 오늘 처음 뵙는데요.” 하얀 옷의 사내는 밝게 웃었다. 갸름한 턱과 서늘한 눈매, 아름다운 미간을 가진 남자는 웃음을 띄며 전통 다기에 차를 따랐다. “그럴 리가요. 그럼 당신은 유퍼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기억이라…. 류는 작게 미소지었다. 난처한 기분이다. 기령도, 그리고 유퍼도, 또한 기와 이 남자도 모두 자신에게 ‘기억’을 이야기 한다. 무슨 기억인지 알 길도 없는 그런 과거를…. 남자는 류의 난처함을 이해했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차를 마셨다. 그는 조용하지만 밝고 경쾌했다. “인도자 유퍼…. 그가 천계에 있을 때의 이름은 ‘유퍼리어’(euphoria) 였습니다. 혹은 사영라고도 불렀지요. 둘다 ‘환상’에 관련된 말들입니다. 혹자는 그를 아누비스라고도 불렀습니다. 죽은 자의 사자입니다. 당신이 유퍼를 기억하지 못한다니… 유퍼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그렇다쳐도… 굉장히 안타깝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그가 건넨 차에서는 향긋한 냄새가 났다. 류는 그것을 오랫동안 음미했다. 맛은 약간 신 맛이 났다. “산수유 차 입니다.” 류가 그 차를 오랫동안 응시하자 남자가 설명하며 빙긋이 웃는다. “머리가 아프거나 열을 내리는데 좋습니다.” “…….” “그러나 좋은 차가 기억을 되살릴 수는 없겠지요.” 마침내 궁금증이 턱까지 올라왔다. 류는 자신을 밝게 대접하는 인간 주술사를 쳐다보며 선명하게 입을 열었다. “도대체 무슨 기억을 의미하는 겁니까.” “… 한 때의 기억요. 당신이 이번 생애에서 환생하기 직전까지의 기억들.” “…그런 걸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환생이나 전생을 믿는다면 말이죠.”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뭔가 안타깝다는 듯 표정을 짓다가 다시 이내 밝아졌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부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유퍼는 당신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유퍼 뿐만 아니라…” “…….” “…기도, 기령도, 그리고 저 역시 당신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친구인 치유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치유-!!! 류는 순간적으로 다기를 내려놓았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문제 많은 신앙인 ‘치유’? 그 진지하고 호기심 많은 과학도? … 그의 이름을 왜 여기서 들어야 하는가…. 그러나 남자는 작은 한숨과 쓴 미소를 동시에 짓는다. 그로서는 류의 태도가 더욱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류….” “…….” “…유퍼는 당신이 망각의 강을 건널 때 마지막으로 당신을 현생으로 인도한 영혼입니다. 그는 전생에서도 천계의 인도자였습니다. 안내인이었습니다. 원래는 빛의 사람이었지만, 그는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어야 하는 것 중 하나를 말했고…” “……!!!” “그 업(業), 그 카르마 때문에, 중립이었던 망각의 강에서 마계로 추방당했습니다.” 망각의 강- 갑자기 유퍼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강물처럼…’ 이라던 그 말…. “혹자는 그 강을 ‘레테의 강’이라고도 부르고, 황천이라고도 부르고… 망각의 강이라고도 부릅니다. 어느 쪽이든 사후 세계의 마지막 통과 의례 입니다.” “… 그 말은… 제가 환생하기 직전에 유퍼를 보았단 말씀입니까?” “보다마다요. 그는 당신이 망각의 강을 건너고 환생의 문을 통과하기 직전까지 당신을 위해 노를 저었습니다. 사실, 당신을 위해 수천번도 그렇게 했습니다. 당신이 환생할 때마다….” 뭔가 어렴풋이 떠오를 듯 머리 속에서 가라앉았다. 늘 꾸는 꿈- 설명할 길 없이 가슴을 치밀어 오르던 기묘한 슬픔의 꿈- 그것이 떠오른다. 그 꿈 속에서는 검고 푸른 강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고, 난폭한 바람이 불었으며, 습한 안개 속으로 태양을 가리는 기암절벽들이 즐비했었다. 자신은 그 꿈의 강에서 배 위에 앉아 있었는데, 노를 젓는 사람을 확인할 길은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의 말로는 그 노젓는 사람이 유퍼였고, 자신이 꾼 그 꿈은 환생하기 직전의 죽음의 강이었다.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고민하실 필요 없습니다. 때가 되면 다 아실 겁니다. 다만, 우리들 여섯이 모여야 하는 가운데, 그 중 셋은 하늘나라에서 온 자들이고, 나머지 셋은 서로의 인연으로 태어난 인간이라는 점이 있을 뿐입니다. 기령과 기와 유퍼가 천계에서 온 자들이고, 당신과 나와 당신의 친구인 치유가 바로 원래부터 인간이었던 자들입니다.” “…….” “… 우리는 인류가 기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 시대 때 같이 있었습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류의 귓가로 주술사가 말했다. 그는 한가롭고 여유있어 보였다. “당신은 한 가지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오늘 제가 당신을 뵙고자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 남자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비어 있는 잔에 산수유 차를 더 따랐다. 손에 쥔 다기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류….” “…….” “… 사연을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당신은 저번 생애에서 중요한 선택을 하나 했습니다. 우리들 여섯 영혼은 당신으로 인해 이끌려서 지금 시대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심지어 한 때 저승사자 혹은 안내자였던 자도, 천사 혹은 신성한 자도, 악마 혹은 불경한 자도… 우리들 모두 말입니다. 절대악, 절대선, 인도자와 마법사, 그리고 치료자 까지… 우리가 여기 모이고 있는 것은 오직 예언 때문입니다.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 입니다. 곧 그 시간이 옵니다.” “…….” “… 절대선이나 절대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당신의 위치입니다. 당신은 예언가이고… 그것은 당신이 실제로 그 능력을 사용하느냐 아니냐와는 상관없습니다.“ “… 저는 예언을 할 줄 모릅니다.” 그러자 남자는 선량하게 웃었다. 풋풋하고 착한 웃음이었다. “그럼 한번 해 보십시오. 어렵지 않습니다.” “……!!!” “태초에 말씀이 있었습니다. 현상이 아니라 말이 먼저였습니다. 그게 예언의 힘입니다. 위대한 예언가가 예언을 하면, 다른 요소들은 불가항력으로 그 예언을 이루기 위해 고리를 짭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연이 됩니다. 우주는 위대한 예언가의 말에 따라 움직입니다. 우주의 움직임을 읽어서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 “예언이라는 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맞히는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언은… 선언입니다. 고대로부터 예언자들은 믿음의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가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미리 만들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선각자 입니다. 예언은… 만드는 것입니다.” “그럼… 제가 말하는 것에 따라서 실현된다는 말씀입니까?” 그 때 갑자기 남자가 손을 뻗었다. 이제 인간의 나이로 서른 줄에 다다른 듯한 그 남자… 손바닥이 뜨거웠다. 정갈하고 하얀 모습과는 다르게, 그는 뜨거운 핏줄기를 증명하듯 손을 뻗어 류의 얼굴을 잡았다. 그리고는 강한 힘으로 가까이 끌어당겼다. 류는 갑자기 정신이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마에 닿는 뜨거운 입술- 마치 주술자 자신이 류에게 예언자의 지위를 봉하듯, 그는 이마에 입을 맞췄다. 뜨거운 입김이 순결한 이마에 닿으며 갑자기 체온이 상승했다. 알 수 없는 기묘한 힘이 발바닥 아래에서 차곡 차곡 쌓여 온다. “순결한 류…. 당신은 예전부터 아름다운 영혼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했습니다. 당신이 위대한 예언가 입니다.” “…….” “…물론 당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예언자 입니다. 어떤 종류의 믿음으로 선언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당신이 절대선과 절대악, 누구를 위해서 예언하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예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언가와 위대한 예언가의 차이는…” “…….” “…위대한 예언가는 바로 자기 자신의 말의 힘, 선언이 곧 이 싸움을 끝낼 것이라는 걸 압니다. 그냥 예언가는 스스로가 미래를 볼 줄 안다고만 여기지만, 위대한 예언가는 자신의 선택이 모두의 선택이라는 걸 압니다. 말씀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예언가의 한마디는 곧 기적입니다.” 주술가는 그 말을 끝으로 류의 얼굴을 놓았다. 류는 그가 자신이 하고자 한 말을 다 끝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자신에게 방금 주술을 걸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리없이 일어나 문지방으로 향하며, 류는 문득 처음부터 알았어야 했던 사실 하나가 떠올랐다. “이름이 어떻게 되십니까?” 그러자 안개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사내는 쓸쓸하게 웃었다. “저는 그냥 주술사 입니다. 쉬운 말로 마법사 입니다…. 한 때는 신으로 추앙받았고, 다른 때는 제사장이었습니다.” “…….” “그러나 저의 전신은, 인류의 세대가 시작할 1세대 때부터 ‘도트’라는 주술의 창시자였고, 또 다른 문화에서는 테스카틀리포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영혼으로부터 분리되어 나왔습니다.” “…….” “…지금의 제 이름은 ‘무연’입니다. 안개 ‘무’라는 한자에 인연 할 때의 ‘연’자 입니다. 사람들은 저를 그냥 ‘연’이라고 부릅니다.” “…….” “…당신의 예언이 끝나면 저는 사라집니다. 하지만 당신의 예언이 있었기 때문에 저도 있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태어난 존재일 뿐입니다. 오늘 당신과 만나기 위해 수천년 전에 준비된 영혼일 뿐입니다.” “…….” 마지막으로 그가 인사를 건넸다. “평화가 형제와 함께…” 그리고 소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류는 손도 대지 않은 문을 곰곰이 지켜보다가 석연치 않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방을 나왔다. 연이라 불리는 사내는 밝고 따뜻했으나 어딘가 슬픈 것 같았다. 그 점이 류의 마음에 내내 가라앉았다. ***** 주술가 연을 만나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짧게 끝났다. 기령은 건물로 돌아오자마자 류를 외면하고 빠른 걸음으로 들어섰다. 수하 중 하나가 거친 어조로 말을 걸고 있었다. “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 “정보에 의하면 치유자와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성족들은 자신들과 함께 있는 인간이 치유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 “…아이언님. 그들이 함께 움직이면 이 쪽도 예언자를 빨리 활용해야 합니다. 주술자가 중립이므로, 저 인간만 우리 계에 흡수되면 우리가 더 빨리… 성족들을 멸하고, 인간계를 우리의 지배하에…” 그러나 기령은 귀찮다는 듯 손을 한번 높게 들었다. 그는 그저 검은 장막이 쳐져 있는 내실로 들어섰을 뿐이다. 따라오는 것은 오직 유퍼였다. “웬일이십니까?” 차분하게 놀리는 듯한 말투. 비록 유퍼 자신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말투는 천계에서도 변함없었다. 유퍼는 기령이 성족을 떠나오기 전부터 늘 함께였다. 마지막에 그가 천계를 반역하고 마계로 들어왔을 때도 유퍼만이 뒤 따랐다. 하지만 유퍼도, 류도, 그리고 치유라는 치료자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류가 아무 것도 기억치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사람이 류 자신인데도, 그 조차도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웬일로 류님에게 가만히 있으셨습니까?” 유퍼는 장막을 내리고 들어서며 여전히 재미있다는 말투였다. 기령은 대답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 내실에 찬 포도주를 따라놓고 갔다. 그것을 보며 기령은 얼굴을 차갑게 굳혔다. “또 웬일로 오늘은 누군가를 소멸하거나 죽이라는 명령도 안 내리십니까?” “…….” “…당신은 전쟁과 파멸, 기아와 이별, 그리고 음란한 유혹의 신입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마음이든 몸이든 잿더미로 만들고… 단 하루도 그걸 멈춘 적이 없습니다. 당신의 한마디에 모두가 움직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또 웬 일이십니까? 보통 때라면 성질대로 뭐든지 다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 “연에게도 오늘 얌전하셨습니다. 보통 때라면 비아냥 거리기라도 하셨을텐데요.” 기령은 무표정하게 그런 유퍼를 노려보았다. “뭘 원하는 거지?” “… 제가 모시는 주인님의 결단… 그리고 진실. 당신의 변화가 누구 때문인가-를 듣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유퍼의 진지한 표정에 코웃음이 절로 나왔다. “타락한 천사, 그것도 절대악이라는 본성을 담고 태어난 인간에게 진실을 요구한다라…. 많이 선량해졌군, 유퍼. 너는 류에게 너무 관대해. 연에게도 마찬가지고.” “류 님은 그저 기도할 뿐입니다. 기도나 명상 외에는 하는 일도 없는걸요. 연도 마찬가지 입니다. 왜 제가 그런 그들을 죽이는가 살리는가로 고민해야 합니까.” 유퍼는 자기야 말로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이었다. 기령은 무심하게 포도주 잔을 집어들었다. 손바닥에 넣고 잔을 굴리자, 물 알갱이들이 안에서 부딪친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 “…류 님과 아이언 님 두 분 다 입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경솔하게도 저는 류 님을 동정합니다. 그는 아무 것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동반자, 기 만을 걱정합니다.” “…….” “또한 늘 그렇듯, 저는 아이언님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저도 류 님을 죽이거나 해치길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저보다 더 망설이실 분이 바로 아이언 님이십니다.” “무슨 근거로?” 기령은 다시 피식 웃었다. 그래서- 라고 반문하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류 님은 우리 쪽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언.” “… 알고 있다.” “류 님의 에너지는 신성합니다. 적어도 예언가가 말한 여섯 개의 영혼 중에 네 개는 우리 쪽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멸입니다. 자멸에 이를 바에는 성족들도 ‘사자의 서’를 열지 못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야 말로, 사자의 서를 여는데 필수적인 예언가를 없애는 게 가장 현명합니다.” “… 역시 알고 있다.” “… 알고 계신 분이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십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류 님이 죽는 게 낫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제 마음을 흔들리게 하고, 어떤 답도 내리지 않는 이 상황이 좋으십니까?” 기령은 차가운 손가락 끝을 입술에 대었다. 그는 류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를 떠올렸다. 유퍼의 걱정도 듣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 속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일말의 양심이 싫었다. 그것이 싫어서 검은 피가 솟는 마계로 건너왔는데… 시간이 이만큼이나 흘러도 소용없는 감정들이었다. 오래전에 그 감정들은 끝이 났다. 오래전에 류는 자신이 아니라 기를 택했다. 그 수많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자신이 아니라 기를 선택했다. 그 순간 기령은 다짐했었다. 너로 인해 생겨나고, 너로 인해 강해진 신성을 버린다- 라고. 그 날의 거칠게 찢겨진 마음들과, 그 날의 설명할 수 없는 광폭한 마음들은 천계에 버리고 간다- 라고. 자신을 버린 것은 류였다. 그가 기억하든 못하든 상관없었다.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은 그를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인간의 말처럼 천국과 지옥을 오르락거리게 만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신성했던 힘은 류와 함께 한 시간들로 강해졌고, 마찬가지로 류는 자신에게서 숨겨져 있던 악마적 본성을 깨웠다. 그러니 죽이고 싶을 수 밖에- 류를 없애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았다. “아이언 님?” 유퍼가 자신을 깨우듯 불렀다. 기령은 차가운 잔을 쥔 채로 암흑에 쌓인 창 밖을 보고 있었다. 하얀 달이 연의 주술처럼 허공에 걸려 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유퍼에게 물었다. “내가 왜 류를 살려두는지 궁금하나, 유퍼? 그가 예언가, 그리고 전생에서부터 성족과 함께 해 온 예언가라면 없애는 게 맞다라는 건가, 지금?” “…네.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리 쪽으로 하시던지요.” 빙글- 몸을 돌려 유퍼를 바라본다. 아주 잠시, 류를 다시 마주하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도 움직이고 있고, 치유자도 찾아냈다. 류를 살려두면 어떻게든 다시 그는 기를 선택할 것이다. 오래전의 그 날처럼- 그리고 남겨지고 버림받는 상처는 오직 그것을 기억하는 자만의 몫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인간의 몸을 입은 자신에게서 흉부가 갑갑하게 아파왔다. 위장을 비트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기령은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은 류가 실용가치가 있기 때문이지.” “…….” “…적어도 류가 신성을 포기하지 않아서 죽어야 한다면…” “…….” “…천계의 형제들이 마주했을 때, 없애는 게 가장 나다운 짓이지.” “…아이언!!!” “그것도 아니라면, 기가 이 곳에 들어왔을 때… 영혼의 연인이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든지 말이야. 어느 쪽이든 악마로서 못할 건 없지, 안 그래?” 유퍼가 작게 신음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기가 찬다는 듯 자신을 쏘아봤을 뿐이다. ***** 어딘가 균형이 깨진 듯 하면서도, 고풍스럽고 아름다운 집. 그러나 지나치게 고즈넉하고 어두워서 마치 혼령들이 떠도는 듯한 건물. 류는 이 곳이 그렇다고 여겼다. 유퍼의 말로는 이 곳 어딘가에 마계로 통하는 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런 것은 궁금하지 않았다. 적어도 자신은 아직 죽은 혼령들이 보이지 않으니 안심해야 할지도 모른다. 류는 이불 위에 누워서 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아주 작은 창 밖으로 달이 뜬 밤이었다. 하필이면 왜 북향으로 지었는지, 창도 거의 없는 건물에 작은 창마저도 햇볕은 들지 않았다. 햇빛이 없다면 달빛이라도 봐야지- 라고…. 무심하게 달을 보고 있었다. 오늘 만난 ‘연’의 말들과 이전에 유퍼가 했던 말들… 그리고 다소 혼란스러운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듯 먹구름이 몰려왔다. 인기척이 들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유퍼와는 발걸음 소리부터 다르다. 항상 차갑고 깊은 울림이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이 발걸음은… “이 밤중에 무슨 일이십니까.” 발걸음 소리조차 기와 닮았다. 그러나 기보다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한밤중의 손님은 의자에 주저앉으며 표정 없이 답했다. “내 포로를 내가 감상하러 오는 것도 일이 있어야 하는가?” 건방진 말투, 차갑고 삐딱한 웃음…. 류는 고개를 돌리며 온화하게 웃었다. “이곳의 주인이 당신이라는 걸 너무 각인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 “…그렇게 하지 않아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시선이 부딪치는 순간, 류는 잠시 멈치했다. 검은 셔츠의 앞섬이 풀려있었고, 넥타이는 아무렇게나 셔츠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검고 윤이 나는 머리카락은 어딘가 흐트러진 표시가 났는데, 마치 이 곳으로 오기 전에 기령답지 않게 고민이라도 있었는가- 라는 의심을 만들었다. 류는 그가 여전히 싫었다. 나무랄 바 없이 잘생기고, 강인한 외모와 체격이었지만, 그 늘씬한 몸과 미혹적인 눈매조차도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한 수단임을 잘 알았다. 천성이 아름다운 기와는 다른 것이다. “연이라는 자가 저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오셨습니까.” “…그럴 리가. 연이 뭐라고 말했든 그건 내 영역이 아니다.” 류는 버릇처럼 눈썹을 밀어올렸다. 자신은 늘 깨끗하다, 친절하고 온화해 보인다- 등의 칭찬만을 듣고 살았는데, 어찌 기령과 함께 있을 때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다. 마치, 그가 요 전날 키스했을 때처럼, 그의 부글거리는 뭔가가 자신에게 전이되는 듯한… 아…, 하필 떠올랐다. 키스. 왜 그런 짓을 했던 거지…. “얼굴을 보자마자 기분 나쁜 표정을 짓는군.” “…….” “너무 그렇게 대놓고 미워하지 말라구, 류. 조만간 너의 기가 너를 찾으러 올테니까.” 그 입맞춤이 무슨 의미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류는 고단한 목덜미를 어루만지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예언가고 뭐고, 다른 능력은 필요없으니, 만약에 다음번에도 그가 이토록 불쑥 찾아온다면 그것을 알아차리기나 했으면 좋겠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걸 아시면서 굳이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 “다음 번에 절 죽이려거든 환한 대낮에 찾아오십시오….” 그러자 기령이 희미하게 웃었다. 류는 다시 눈살을 찌푸렸다. 기령의 웃음은 눈에 띄지 않을만큼 한 쪽 입꼬리만 슬며시 올라간다. 사악해 보이는 미소였고, 일러주지 않아도 조롱이라는 걸 쉽게 눈치 챌 수 있었다. “내가 너를 없애려 한다는 건 잘 알고 있나보군.” “…저는 당신을 위해 일하지 않을테니까요.” “…그럴테지.”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나를 죽이든 죽음 너머가 두렵지 않습니다.” 류는 단호하게 말하고 돌아섰다. 아직 다 펼치지 않은 이부자리가 차가웠다. “오늘 죽일 생각이 아니시라면 돌아가시면 어떻겠습니까?” “…….” “…당신과 주술가 때문에 저는 피곤하거든요.” 신경쓰지 않는 말투로 다소 딱딱하게 덧붙이며 류는 이불을 펼쳤다. 어서 그가 나가고 편하게 눕고 싶었다. 사실 류는 이 곳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뭔가 음침하고 어둡고, 그리고 오래된 기분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상하게 슬픈 기분을 주었다. 예전의 류는 악마들이 이럴 것이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들은 사악하고, 사탄의 추종자들이며, 살육과 타락의 조종자들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러나 이주일 가까이 지내본 결과, 뭔가가 달라졌다. 가령… 류는 영혼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낡고 삐거덕거리는 오래된 나무 계단을 걸을 때마다 가슴이 아파왔다. 이 집이 어떤 사연으로 마족들의 근거지가 되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어쨌든 그랬다. 다만 집과 몇몇 악마들에 대한 동정심이 기령에게까지 미치지는 않는다. 아무 것도 거추장스럽지 않고 초연한 편이 자신에게 그는 다소 부담스러웠다. 무섭거나 두려운 게 아니라, 그저 불편했다. 가령… 그가 뚫어지게 쏘아보는 듯한 유리알 같은 눈동자 같은 것들이…. “당당한 것은 좋은데, 류…” “…….” “순결한 사제, 그래도 나에게 대 예언가와 협상할 수 있는 기회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삐딱하고 거친 말투. 류는 조금 서늘하게 웃으며 이불에서 손을 떼어냈다. 그대로 의자에 거만하게 앉아 있는 검은 사내에게 눈을 돌린다. “… 순결하긴 하지만, 사제는 아닙니다.” “… 그게 뭐든지 나랑은 상관없다.” “저에게는 상관있습니다. 신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모욕하지 마십시오.” “순결과 헌신이라…. 배알이 뒤틀리는 단어들이군. 악마가 신과 신도를 모욕하지 않으면 누구를 모욕하란 말이지?” 류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은 그는 여전히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은 나른한 눈동자와 검은 눈썹이 뛰어나게 조화를 이루었다. 만약 자신이 일반적인 여자였다면 저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그를 섬겼을지도 모른다. 아아… 다행이다. 아마 이런 이유로 남자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한심하지도 않으십니까?” “…….” “하긴 한심할 정도로 양심이 있다면 스스로 타락하진 않으셨겠지요. 아무도 깨끗한 새 신발을 신고 일부러 오물이 있는 곳으로 가진 않습니다.” “…재미있는 비유군.” 본능적으로 류는 입구쪽을 바라보았다. 검은 비단 천에 자수같은 것이 놓여진 옛날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 곳은 원래 무엇을 하던 곳일까. 현대를 짐작하게 만드는 어떤 것도 없는 이 곳은…. “문을 보고 있는 건 나더러 나가라는 말인가, 건방진 사도?” “…그래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쨌든 전 인간이니 한숨이라도 자야하거든요.” 기령이 일어섰다. 류는 눈에 띄지 않게 조금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나가지 않았다. 입구에 다가선 기령은 휘장의 매듭을 풀어 아래로 늘어뜨렸을 뿐이다. 그것은 잠들기 전의 류가 하는 행동이다. 영문을 알 수 없어 쳐다보자, 그는 다시 무표정하게 뒤를 돌아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름다운 새 신발을 신고 일부러 오물이 있는 곳에 가지 않는다고 했지?” “……???” 그리고는 갑자기 검은 셔츠의 소매가 보였다. 휙- 하고 귓가에 바람소리가 일었고, 뭔가 강한 힘이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팔꿈치를 잡아당겼다. “……!!!” 류는 갑자기 코앞까지 다가온 기령의 얼굴에 흠칫 놀라고 있었다. 허리를 잡고 있는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인간의 여자와도 몸을 섞어 본 일이 없는 류는 일순 긴장했다. 마치 저 지하 감옥에서 그가 자신에게 얼굴을 바짝 들이대던 그 순간과 흡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말이야, 류…” “…놓아주십시시오….” 보다 싸늘하게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차가운 기운이 어른거리는 눈동자… 그것이 혹독할 정도로 바싹 눈 앞에서 자신을 관통하고 있었다. 문득 염통이 죄어오는 기분이다. 류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내 단단한 손이 다시 그를 거칠게 끌어당겼다. “네가 만약 정말 구해야 할 것이 그 오물이 가득한 곳에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 “네가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구할 수 없다면?” “……!!!” “가령 말이다… 네가 동경하고 사모하는 영혼의 기가 그 오물 너머에 묶여 있다면? 네가 신성한 신발을 신고 그곳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있다면?” “무슨 말씀을… 무슨 이유를 대든 당신들은 악마의 개입니다. 한낱의 짐승들도 신의 사랑을 받는데, 당신들은 그보다 못한 존재들입니다.” 갑자기 숨소리만큼 기령의 느긋한 말투가 빨라졌다. 그의 음성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그 속도 밖에는 없었다. 마치 공격을 하는 것처럼 강한 어조로 거세게 물어대는 통에 류는 눈만 깜박이고 말았다. 대답할 여유도 없이 꽉 잡힌 거센 힘이 아파왔다. 류 역시 힘이 없는 남자도 아니었지만, 애당초 인간이 아닌 것과 싸운다는 게 무리다. 그는 몸만 인간이었을 뿐이다. 기령이 잡은 손목이 지나치게 아파오는 까닭에 류는 희미하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픈가?” 그러나 그는 류의 그런 포박 상태를 즐기는 듯 상냥한 목소리로 비웃는다. “날개가 잘리는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스스로 무리에서 이탈할 수 밖에 없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아이언…” 무의식중이었다. 류가 그를 기령이 아니라 아이언이라고 부른 것은 정말 무의식 때문이었다. 그가 뭐라고 공격하든 상관없었다. 단지 자신의 힘을 마구잡이로 사용하는 바람에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뭐랄까… 불러 놓고 보니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한번도 그를 아이언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기도, 유퍼도 그를 곧잘 기령과 섞어서 그렇게 불렀지만, 이방인의 느낌을 주는 그 이름은 적어도 지금까지 류에게는 낯설었다. 그러니 지금 상황에서 흡사 조금 책망하듯 그를 그렇게 부른 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아마도 유퍼가 그를 늘 아이언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생긴 착각이리라. “…….” 그러나 그 이름이 뭔지는 몰라도 그에게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기령이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이 조금 풀렸다. 변덕스럽고 난폭한 이 악의 신은 기가 막힌다는 듯 살짝 허공을 쳐다보았다. “이 곳으로 온 용건을 이야기하지.” “…….” “기를 살리고 싶은가? 이 세상을 신의 사도들이 승리하는 세상으로 만들고 싶겠지? 하느님의 영광이 실현하고 싶겠지?” 류는 그의 심기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느덧 조용하고 강한 목소리가 들렸을 뿐이다. 표정없는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은 타는 듯 생생했다. 류는 그의 말에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희생을 한다고 해도? 아까 네가 말한 것처럼 네 자신이 희생당한다고 해도? 그렇다 해도 기와 그의 세계가 승리하길 원하는가?” “…그 역시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러자 기령은 몇 초동안 자신을 가만히 응시하였다. 곧 이어 들리는 것은 차갑고 냉정한 음성이다. “그렇다면 내 것이 되라.” “……!!!” “너에게 선택권을 주지. 스스로 오물 속에 들어가는 기분이 어떤지를 맛보게 해 주지.” 류는 본능적으로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내 것이 된다라는 게 무슨 말인지 알고 있겠지? 우리는 천사의 순결한 맹세나 신성 따위는 필요 없다.” 갑자기 몸이 허공으로 뜨는 기분이었다. 류는 강하게 뿌리쳤지만, 더 거센 힘이 자신의 몸을 덮어버렸다. 눈 앞으로 갑자기 하얀 셔츠가 펄럭인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입고 있던 셔츠다. “당신의 것이 되라니요!!! 이런 식은…” 바둥거리던 두 팔이 간단하게 잡혀버렸다. 그리고 갑자기 숨이 막힐만큼 입을 맞췄다. 꽉 깨문 입술을 억지로 열고 들어온 거친 혀가 난폭하게 안을 휘저어 놓는다. 류는 막힌 입술 사이로 간간히 저항을 내뿜었다. “싫…” 그러나 타액으로 촉촉한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눈에서 불이 일었다. 그가 자신의 머리채를 잡고 벽에 밀어 붙인 것이다. 쿵-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고, 눈 앞이 아찔하다. 도대체 무엇이 그를 분노하게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목을 조르는 강한 힘은 느껴졌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거대한 손아귀의 힘이 자신의 목을 잡고 조르고 있었다. 이대로는 정말 죽겠군… 류는 본능적으로 신을 찾았다. 그러자 희미한 머리 속으로 악랄한 음성이 대답했다. “여기에는 신이 없다. 네가 찾는 신은 더더욱 없다.” “……!!!” “…아까의 말을 실현해야지, 예언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신과 신성을 위해서 살아야지, 류. 악마에게 몸을 팔아라.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지.” 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도 없었다. 눈 앞이 몽롱할 정도로 목을 조르던 그가 기절 직전에 손을 놓았다. 맥이 빠져 무릎이 휘청거리는 그 때에, 그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공기를 찾아 헐떡이는 자신의 입 안으로, 그가 공기를 불어넣었다. 굳어버린 혀를 거세게 감싸는 기분이었다. 아찔한 고통과 갑자기 온 몸이 오슬 오슬 감기처럼 떨려왔다. ***** 류는 그가 자신을 시험한다고 여겼다. 열려진 셔츠 자락 사이로 상체가 드러났다. 벽에 박은 뒷머리가 부은 채로 이불 위로 험하게 던져진다. 팔꿈치를 지탱하며 도망가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그만…” 아무리 순결한 자신이라 해도, 이런 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바가 아니다. 누구의 손길을 타 본 적도 없는 예민한 피부가 따끔거렸다. 고개를 들어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 검은 머리카락을 가까스로 잡는다. “…제발, 그만…” 그러나 기령은 흡사 진공을 빨아들이듯, 류의 맨 살에 입을 맞췄다. 아니, 입을 맞춘다기보다는 곳곳을 잘근 잘근 씹듯이 흘러 내려갔다. “…아…” 유두가 그의 타액으로 반질거렸다. 얼얼할 정도로 통증이 왔고, 곧이어 믿기지 않을만큼 잠깐동안 아찔해졌다. 류는 어지러운 시선으로 창 밖을 집중하려 애썼다. 아까까지의 달이 먹구름에 가려 있었다. 암흑 천지 속에 오직 노란 형광등이 켜진 이 곳만 존재하고 있었다. “달이 아니라 나를 봐야지, 류.” “……!!!” 잠깐이라도 다른 것을 보려고 하면 가차없이 그가 뺨을 때렸다. 결국 류는 이 행위와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스스로가 무너지는 것을 분명히 관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그만 두세요…” 강력한 부탁도 소용없었다. 이 순간만큼 기령이 이름에 걸맞게 잔인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는 류의 허벅지 사이로 무심하게 손을 밀어넣을 뿐이다.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몸을 굳히자, 그것을 더 비웃듯 발목을 잡고 양 쪽으로 크게 벌린다. “…아아…” 류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손지검이 이어졌다. 그는 심지어 자신의 등에 둥글게 이불을 말아 넣고 몸이 활처럼 휘도록 만들었다. 그 바람에 높게 올려진 머리와 허리 탓으로 그가 하려는 행위가 똑똑히 보인다. 누군가에게 보여진 적도 없는 매끄러운 피부가 군데 군데 험하게 붉어져 있었다. 허벅지 사이로 기령의 머리가 들어갈 때마다 류는 울고 싶었다. 몸이 부들 부들 떨려서, 겨우 주먹을 꽉 쥐고 있는 손가락 끝까지 신경이 바싹 말라갔다. “… 예언같은 건 하지 않아도 좋다, 류.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다면 기 정도는 얼마든지 살려주지. 아니, 내가 기의 편이 되어 주지.” 갑자기 다리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류는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뭔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뜨겁고 거친 혀가 시원한 피부를 쓸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지러울 정도의 충격도 잠시… 몸을 두 개로 찢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아앗!…” 그가 자신의 두 발목을 잡고 넓게 벌린 채로 들어오고 있었다. 류의 복부는 지나친 이물감과 고통으로 빳빳하게 굳어간다. 뜨겁고 단단하며 매우 거대한 그의 것이 비좁은 곳을 열고 막무가내로 들어오는 것이다. “……아악!!!!!!!” 저절로 눈물이 났다. 살면서 이런 수치를 처음 겪듯, 이만한 고통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기령은 젖은 검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른하게 속삭인다. “스스로 힘을 빼서 나를 받아들여라, 류.” “…아흑…” “…기가 줄 수 없는 걸 내가 대신 주도록 하지….” “그만…”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무릎이 배에 닿을 정도로 굽혀진 자세로 그는 더욱 강하게 밀고 들어온다. 점점 더 몸이 확장되는 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몸을 열고 여자처럼 그를 받아들이는 수치감, 그것을 똑똑히 전달하듯 기령은 느리고 천천히 삽입해 온다. 고통에 못 이겨 류가 가늘게 전율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눈에 띄게 떨리는 자신의 귓불을 거세게 깨물었다. “잘 봐라, 류.” 내부에 이는 단단한 체온으로 그가 뿌리 끝까지 들어왔음을 직감했다. 견딜 수 없는 치욕과 고통에 류는 눈물이 글썽이는 눈으로 그를 노려본다. 어릿한 눈물 사이로 그가 보였다. 관자놀이에 땀 한 방울 맺힌 색스러운 얼굴의 사내다. 이런 것이 자신에게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몰랐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아래 쪽에서 질척이는 소리와 시트의 느낌이 함께 묻어났다. 미지근하고 축축한 뭔가가 연결된 부위에서 끊임없이 흐른다. 몸 안은 갑자기 침입한 난폭자가 휘저어 놓고 있었다. 밀려오고 밀려 나갈 때마다 그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용서할 수 없는 감정을 담은 류의 두눈을 보며, 사악한 남자는 중얼거렸다. 입을 맞출 듯이 가까워진 얼굴이다. 너무나 달콤한 눈빛이었지만, 그는 본색을 숨기지 않았다. 검고, 은밀하며, 강하면서도 잔인한 그 본성을…. “어떤가? 오물이라 부르는 악마와 교미하는 기분이?” “…닥…쳐….” “…거.짓.말. 배 아래가 나로 가득찬 기분일텐데?” “…으윽…” “혹시 모르지. 내가 변덕을 부리면, 너를 암컷으로 만들어서 악마의 자식을 생산하게 할지도…. 너 역시 나를 신도, 인간도 아니게 취급해왔으니 내 것을 받아들이면 너도 그냥 오물, 병균… 그리고 악마의 개가 될 뿐이다.” 류는 그 순간 이성을 잃었다. 몸 안에서 뜨거운 뭔가가 마구 끼얹어지는 지독함… 그리고 깨끗함이 짓밟혔다는 상실감과 치명적인 상처… 그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으며 소리를 질렀다. 마구 비명을 지르며 기령의 머리를 잡으려 애썼다. 숨 가쁜 소리와 날카로운 고함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이런 모습이 될 거라고는 정말 예상치 못했다. 그러나 찰싹- 기령은 여전히 차갑게 바둥거리는 류의 손을 잡았다. 머리 위로 바싹 잡아 당겨 봉해 버렸을 뿐이다. 그에게는 이런 일이, 아.무.것.도.아.니.었.다. “기절하지 마라. 내가 허락도 안 했는데 기절하지 마.” “…….” “…아직 네 몸안에 내가 있잖아? 어떤가? 내가 움직일 때마다 온 신경이 들쑤시지?” 류는 자신이 뭐라고 대답하는지도 몰랐다. “…죽어도 널 위해서… 네 편에 서지 않아…” 그저 설명할 수 없는 강한 분노와 독기가 머리 끝까지 치밀었을 뿐이다. 그러나 불이 붙는 듯한 자신의 시선에 기령은 가만히 웃었다. 키스하려는 듯 고개 숙였지만, 얼굴을 돌리는 류에게도 그는 느긋했다. 여전히 삽입된 채로, 목줄기를 쓸어내리는 음란한 입맞춤이 전부였다. 그리고 곧 자신의 관자놀이에 뜨거운 입술을 댄 채로 그가 말했다. 어디선가 호흡이 곤란할 정도의 사향 냄새가 풍겨왔다.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미치지도, 기절하지도, 체념하지도 마라.” “…….” “…네가 진심으로 타락한다면 그 때는 내가 버려줄 터이니. 걱정하지 마라, 순결한 예언자. 네가 진정으로 음란해져서 미친 듯이 나를 찾을 때는 내가 너를 버릴테니.” “…꿈도…꾸지…마….” “그때가 되면 내가 널 죽여주겠다. 음란해진 너는 지루할테니까.” 그 순간 머리 속이 붕붕 울리기 시작했다. 허리 아래 쪽에서 리드미칼한 움직임이 거세게 일었다. 류는 입술을 꽉 깨물고 고개 돌렸다. ***** ‘신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셨다.’ -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류는 꿈을 꾸고 있었다. 여전히 검고 푸른 강이 흐르는 그곳이었다. 누군가 노를 젓고 있었고, 자신은 어디론가 떠날 것처럼 보였다. 하나의 영화처럼 그 모든 장면이 꿈 속에서 펼쳐졌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류는 노를 젓는 자에게 물었다. 태어난 이례로 수백번도 이 장면을 꿈속에서 봤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은 뭐랄까… 스스로가 꿈 속의 관객이 된 기분이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꿈 속에서 주인공이었는데… 류는 배를 탄 자신과 노를 젓는 사람, 두 사람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그 때서야 알게 되었다. 이 곳이 황천이구나…. 망각의 강, 레테의 강이구나… 라고. 그 때 물결이 가늘게 파장을 일으켰다. 물방울들이 맑고 차갑게 튀어오른다. 노를 젓던 남자가 천천히 뒤 돌아보았다. 남자는 목까지 올라오고 발목에서 살랑거리며 끝나는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늘씬한 체격이었고, 정갈한 그 옷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또한 진지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은 푸른 녹색이었고, 하얀 얼굴은 맑아보였다. 따뜻하고도 슬픈 눈동자, 누군가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담긴 눈동자- 그 남자는 그런 눈빛으로 류를 쳐다보았다. 그토록 이 꿈을 자주, 그리고 오래 꾸었지만 이런 식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남자가 대답했다. ‘수천번도 지금의 모습 그대로 다시 건너셨지만, 질문을 하신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 ‘당신이 내게 질문할 이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저 역시 아무 것도 기억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남자는 부드러운 녹색 머리를 쓸어올렸다. 그리고 쓸쓸히 덧붙였다. ‘이제야 당신에게 뭘 물어야 하는지 기억납니다.’ ‘……???’ ‘왜 그런 선택을 하셨습니까.’ ‘……!!!’ 갑자기 류는 벌떡 일어섰다. 지금까지 꾸던 꿈의 스토리와는 전혀 달랐다. 언제나처럼 가슴을 저미는 답답함, 그리고 숨도 쉬기 어려운 아픔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 달랐다. 절박한 뭔가, 답을 알 수 없는 뭔가가 너무나 질식할 것 같았다. 이 꿈에서 깨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대답을 들어야 했다. ‘제가 무슨 선택을 했다는 겁니까….’ 처음에는 그도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류는 지치지 않고 열렬하게 그의 옷소매를 잡았다. ‘가르쳐 주십시오. 유퍼…’ ‘…….’ 그의 눈동자로 경악이 흘러갔다. 그리고 류 스스로도 놀랬다. 그렇다, 노를 젓는 자는 바로 ‘유퍼’였다. 말하기 전까지는 전혀 몰랐다. 그는 현세에서도 같은 얼굴을 지니고 있었는데…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히 보였다. 강물에 그림자가 비추지 않는 사내, 정갈하고 깨끗한 얼굴의 이 사내는 ‘유퍼’였다. ‘제발…’ 다시 한번 호소하자, 유퍼는 눈을 깜박였다. ‘이 꿈은 연의 주술 때문에 이뤄진 겁니다, 류.’ ‘……!!!’ ‘나도 같은 꿈을 계속 꾸었습니다. 배를 젓고 있었고, 누군가 그 꿈 속의 배를 탔지만 한번도 당신이 스스로 나를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주술가…’ 그제서야 류는 연이 자신의 이마에 입을 맞추며 축복했던 말들, 『평화가 형제와 함께…』 그것이 주술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꿈 속에서 바로 유퍼와의 만남을 유도했던 것이다. 그들이 서로 진실을 알게 될 때까지. ‘류…’ 그 때 생각에 잠긴 류에게 유퍼가 어깨를 두드렸다. ‘이것은 환생하기 바로 직전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건, 도대체 제가 이 직전에 무슨 선택을 했냐는 것입니다…. 그 애절한 호소에 답하듯 유퍼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저는 당신을 마지막으로 배웅하고나서 이미 신성을 배신했습니다.’ ‘…….’ 두근 두근- 꿈 속에서도 맥박이 어지럽게 뛰어 올랐다. 눈은 뚫어질 듯이 유퍼의 입만 보고 있었다. 그는 조용하게, 그리고 침착하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류, 당신의 소울메이트, 당신의 동반자, 당신이 수 천년간 허락해 온 수호자는 바로 아이언이었습니다.’ ‘……!!!’ 갑자기 숨이 꽉 막혔다. 류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절래 절래 고개를 저었지만 유퍼는 부드럽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아이언이었습니다.’ ‘…그럴 리가…’ ‘당신과 아이언은 예언자와 수호자로서 완벽했습니다. 원래 절대선은 기가 아니라 아이언이었습니다. 당신이 가진 예언의 힘은 아이언을 만들었고, 아이언이 가진 신성한 카리스마는 당신의 예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럼 왜…’ ‘당신이 이 강을 건너기 직전에 아이언을 버렸습니다. 매번 환생할 때마다 자신의 수호 천사를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특권… 당신은 당신과 아이언이 창조된 이례 처음으로 아이언이 아니라, 그의 쌍둥이 영혼인 기를 선택했습니다.’ ‘……!!!’ 뭔가가 어렴풋이 떠오를 것 같았다. 두 가지 단어였다. 금지와 금기. 이상하게도 그 단어는 유퍼 자신에게서 들은 말 같았다. 언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 그랬다. 유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숨처럼 설명했다. ‘아이언은 금지와 금기를 모두 어겼습니다. 천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가장 엄격하고 가장 성스러웠던 자로서는 더욱 있을 수 없습니다.’ ‘… 금지와 금기…’ ‘예…. 금지는 바로 살인이었고, 금기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신성한 사랑이 아닌… 욕정으로의 대상이었습니다.’ ‘……!!!’ ‘아이언은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불경하게도 살인을 저지른 이유입니다. 전생에서도 당신은 인간이었고, 아이언은 천사였습니다.’ 류는 입을 잠깐 벌렸다. 공기가 부족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단지 열병에 걸린 것처럼 속수무책 중얼거렸을 뿐이다. ‘기령이… 나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구…요?’ ‘…….’ ‘…누구를? 왜?’ ‘… 수십명을. 그리고 당신의 간곡한 부탁으로 당신 자신을….’ ‘……!!!’ ‘아이언님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겁니다….’ 하느님…. 류는 그 말만을 할 수 있었다. 유퍼는 배를 강가에 정착시켰다. 류는 이 배에서 내리면 꿈에서 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만!!!’ 뒤 돌아서는 유퍼의 긴 옷자락이 바람에 날렸다. 류는 다급한 마음에 그를 부르고 말았다. 주술이 끝나면 시간이 없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만 더… 한 가지만 더…’ ‘…….’ 입안이 바싹 마른다. 꿈속에서라도 이렇게 갈증이 나는 것은 처음이다. 류는 타들어가는 입술을 축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 ‘…저도… 아이언을 사랑했습니까? 욕정의 대상으로요?’ 그러자 유퍼는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 ‘…아이언 님도 그런 이야기를 입밖에 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엄격하고 강하며 신성한 영혼이었습니다. 그의 전신은 루시펠이라고도 합니다…’ ‘미카엘과 루시퍼…’ ‘예, 신성한 기 님은 미카엘님의 혼으로 탄생했습니다. 그러나 루시펠과 미카엘님도 원래 형제였습니다.’ 어느 날 치유가 자신에게 알려주길… 천사 미카엘은 세라핌이라는 직급에 있던 천사였다. 어느 날, 같은 세라핌이었던 신성한 천사 루시펠이 신성을 반역했다. 쌍둥이처럼 탄생했다 여겨지는 미카엘의 형제 루시펠은 천사 1/3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키지만 곧 미카엘에 의해 패배한다. 반란을 일으킨 루시펠과 천사들은 ‘타락한 천사’라는 이름으로 지옥으로 떨어지는데, 그가 바로 사탄의 아래에 있는 마계의 이인자 루시퍼이다. ‘그럼… 아이언은 루시퍼 입니까?’ 단적으로 묻는 질문에 유퍼는 고개 저었다. ‘아니요. 전신(前身)일 뿐입니다. 일종의 천사들의 업입니다. 강력한 카르마로 탄생한 2세대들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루시펠과 미카엘의 영혼을 따라 , 그들이 업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루시펠도 신을 배반했고, 미카엘은 그와 전쟁을 한 후 단죄했으며… 아이언도 신을 반역했고, 기는 그와 전쟁 중이다. ‘결국… 저는 아이언을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아이언이 쓸데없이 집착했다는 말입니까?’ 쓰게 중얼거리자 유퍼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누가 누구를 사랑해서 그런 결과를 만들어냈는지는 당신만이 기억해 낼 수 있습니다, 류.’ ‘…….’ 그러자 찬 바람이 불었다. 류는 이상한 기분이 들어 뺨을 만져보았다. 왜 울고 있었을까… 왜… 언제부터… 의아한 자신의 표정에 유퍼가 공손하게 고개 숙였다. ‘평화가 위대한 예언자와 함께…’ 이제 이 꿈속에서의 그는 마지막이다. 어쩐지 그럴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무심결에 류도 고개 숙여 인사했다. ‘또한 위대한 인도자와 함께…’ <신성모독 神聖冒瀆 5> 치유는 기가 좋았다. 더불어 그와 함께 간 어떤 선술집도 좋았다. 일단은 기가 술집을 간다는 것에 놀라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 술집의 주인하고 친하다는 것도 재미있었다. 원래 반항적인 신앙인에 속했던 치유는 기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예외적인 행위’들이 조금은 좋았다. 선술집 문을 열 때 자욱하게 풍기는 담배 연기도 좋았다. 카운터에 서서 술을 따르던 술집의 주인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아아… 이 죽여주는 젊은이는 누구야?” 술집은 낡았고, 나무 의자와 테이블로 이뤄져 있었다. 주인은 허리에서 매는 앞치마를 매고,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둥둥 말고 있었다. 기가 권하는 의자에 앉으며, 치유는 대놓고 그를 관찰했다. 삐딱하게 담배를 문 입술 끝으로 보조개가 있는 남자다. 눈썹에는 링을 하고 있었고, 입술을 붉고, 머리 색깔도 붉었으며, 눈은 아몬드 모양이었다. “와~ 눈이 아몬드 같이 생겼어요.” 치유가 싱글거리며 이야기 하자, 이 남자는 예쁜 눈썹을 치켜 올리며 큰 소리로 웃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 말을 하는군. 기!!! 이 쒝~시~한 신부는 누구지?” 그는 몹시 유쾌한 사람 같았다. 한 쪽 손을 허리에 얹고, 다른 한 쪽 손으로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소리나게 내려놓는다. “자자~ 고백하라구. 이 친구 어디서 주웠어?” 기는 그런 남자의 태도에 난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치유는 이 남자의 이름이 궁금할 지경이었다. 또한 자신은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성격이다. 그 쯤에 기가 명랑한 그의 목소리를 달래듯 반쯤 웃었다. “가브리엘…” “말리지마, 기. 개인적으로 절제된 신부복은 딱 내 취향이야! 리얼리 원츄 하지!” “… 가브리엘… 제발…” “말리지 말라니까…. 내가 왜 굳이 이 고생을 하며 지구까지 내려왔는데?” 치유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탁자 위에 팔을 올렸다. 가브리엘이라… 혹시 대천사 가브리엘? 설마~ 세례명이겠지…. “헤이~” 눈동자를 굴리는 사이, 가브리엘이라고 불린 사내는 밝게 웃으며 치유의 앞에도 술잔을 놓았다. 눈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친절하게 손도 내밀었다. “내 이름은 지로. 가끔 천계의 사람들은 나를 에던이라고도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은 지금처럼 가브리엘이라고도 부르지. 나는 한 때 광명의 신 '루'라고도 칭송받았지. ” “…혹시나 해서 묻는데요…. 혹시 당신도 천사인가요?” 그러자 지로는 웃었다. “빙고, 나이스 핸섬 가이!!! 모르는 게 없군! 그렇다고도 볼 수 있어. 기가 미카엘로부터 나왔듯이, 나도 가브리엘에서 나왔으니….” “에?…천사도 애가 있어요?” 치유는 정말 궁금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로는 웃다가 넘어갔고, 기는 그 말에 의자에서 떨어졌다. ***** “자, 봐봐, 잘생긴 젊은이…” 지로는 물이 가득담긴 컵을 들었다. 그리고는 나무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몇 방울 떨어뜨렸다. “바로 이런 거야.” “……???” “…하나의 물줄기. 그리고 여러 개의 물방울…. 하나의 영혼, 그리고 그와 같은 속성을 가지면서도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는 영혼…. 아프리카의 물과, 한국의 물과, 일본의 물과, 미국의 물이 색깔이나 맛이나 향이 다르더라도, 여전히 그들은 물이지. 그들을 한 방울씩 떠서 같은 컵에 담으면 그건 그냥 ‘물’일 뿐이야. 영혼이란 그래. 그리고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아하…” 그러니까, 지로는 자신이 가브리엘과 어떤 관계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홍길동과 같은 거군요?” 자신의 명석한 대답에 지로는 예쁜 눈을 빛내며 쳐다본다. 한 눈에 보아도 그가 미소를 잘 짓는다는 게 보였다. 입꼬리 끝의 웃음 자국이 너무나 매력적이다. “홍길동처럼 둔갑술인가… 그거 하는 거잖아요? 하나의 홍길동, 그러나 비슷한 성격을 가진 여러 개의 홍길동을 머리카락으로 만들잖아요.” 그러자 기가 맥주를 마시다가 푸훕- 하고 쏟아냈다. 지로는 목 너머로 기침을 하듯이 웃어댔다. 그는 여전히 생글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얼굴을 바짝 붙였다. “똑똑하군. 마음에 들어.” “…….” “…그래서… 네 정체가 뭐냐?” 힐끔 눈동자를 돌리자, 눈꼬리 끝으로 묵묵히 맥주를 마시는 기가 보였다. 치유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사람인데요….” 사람? 지로는 확인하듯 눈썹을 한 쪽만 씨익 올렸다. 치유는 다시 한번 확인 시키듯 단호하게 말했다. “일.반.인.요.” “……???” 그리고는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지로는 못 말린다는 듯 웃음을 짓고 말았다. “기, 나는 이래서 인간이 너무 좋아…. 이럴 때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보람을 느껴!” “…제발 그만 해, 에던. 치유가 당황해 하잖아….” 그 순간 갑자기 영화처럼 지로가 웃음을 딱 그쳤다. “흥- 당황하라지…” 그리고는 문득 테이블 위의 냄비 뚜껑을 들어 숟가락으로 요란하게 두드리기 시작한다. “자자~ 영업 끝-” “에?” “모두 닥치고 집으로 돌아가라구~ 오늘 영업은 여기까지!!!” 술집의 손님들은 이런 일에 왠지 익숙해 보였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님들이 어깨를 잡아끌었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게 지로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를 뜨겁게 안았고, 다른 누군가는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 입을 맞췄다. 술 취한 사람들이었지만, 다들 지로를 좋아했다. 어떻게 보아도 한 눈에 그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게 느껴졌다. 치유는 기와 더불어 그도 좋아졌다. 왜 천사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예쁘게 태어나는 걸까. 불공평하면서도 마음에 든다. 적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동경할 만한 뭔가는 있어야 하니까. ***** “정말 가브리엘이에요? 아니, 가브리엘에서부터 나온 사람이에요?” “그렇다니까~ 싸인이라도 해 주랴?” “와~ 어쨌든 그럼 유명하신 거잖아요. 성서에도 몇 번 나온다구요. 미카엘 님과 더불어…” “… 우리엘도 있지.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나야. 어쨌든 아름다우면 어디서나 환영 받거든~” 지로의 넉살에 치유는 웃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천사 같지 않아요.” “이 죽여주는 외모가 뭐 어때서?” “저기… 외모가 아니라… 그 뭐라고 할까… 하는 행동이…” 굉장히 달콤한 얼굴이다. 가늘게 휘어지는 눈매는 초승달의 맵시다. 반짝 치켜떴을 때는, 동양인에게는 드물다는 아몬드 형 눈매에 눈동자가 검다. “아무튼 천사야. 이제 그만 닥치라구.” 지로는 손을 휘휘 저으며 웃었다. 그리고는 조금 진지한 얼굴로 기를 향해 고개 돌렸다. “그래, 류를 찾으러 갈 계획은 세웠어?” “…아마도.” “뭔 대답이 그래? 그 좆같은 건물을 아예 박살내 버리자구.” 치유는 이제 슬슬 지로의 험한 입담에 익숙해질 것 같았다. 더불어 그의 깨끗한 귓불에서 반짝이는 링 모양의 귀걸이에도…. “연만 우리를 도와줘도 좋을텐데…” 기는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맥주잔을 들어올린다. 그러나 지로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 기색이다. 팔짱을 낀 채 거만하게 턱을 치켜 올리며 ‘흥’이라고 코방귀를 꼈다. “연은 스스로 자기 계에 갇혔어. 그 녀석은 절대 중립을 지킬 거야. 마음이 여리거든….” “…….” “…기, 연에게 너무 강요하지 마. 연은 12세대 때도 너와 아이언을 동시에 모셨어. 거부할 수 없지. 둘 다가 소중할 거야.” 그러자 기는 마음이 불편한 듯 아름다운 양미간을 찡그렸다. “그건 너도 그렇지, 에던. 넌, 나와 아이언 둘 다를 알고 있어.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형제였잖아. 그럼에도 너는 아이언을 따르지 않고 나를 따라왔지.” “…에이, 그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그래, 뭐… 사실 아이언도 좋지만 내가 굳이 너를 선택한 건…” 치유는 그가 뭐라고 말할지 너무 궁금해졌다. 물론 궁금할 필요도 없는 대답이었지만…. “네가 더 예쁘거든, 기….” 그는 정말 애석하다는 듯 가슴에 손을 얹고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치유는 자신이 생각하던 ‘천사’가 얼마나 동떨어진 존재였는지를 깨달았다. “사실 말이야, 내 취향은 나도 몰라. 아이언이 가장 아름답지, 물론…” “…에던….” “…그런데 너는… 왠지… 곁에 있어줘야 할 것 같아. 너무 차갑거든…. 뭔가 빠져 있어. 정의만 살아있고, 아이언의 열정을 닮지 못했어. 나의 넓은 마음은 그런 너를 보면서… 천상의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그 기계같은 차가움에…” “…에던!!!” 횡설수설하는 지로를 향해 기가 딱딱하게 내뱉는다. 그러나 지로는 기죽지 않고 이번에는 치유를 향해 고개 돌렸다. 여전히 생글거리고 있다. “…한마디로 나는 외모의 취향에서는 아이언이었지만, 왠지 기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지, 형제.” “…에…저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닥치고 들어. 아무튼 안타까운 일이야. 1등하는 넘과 2등하는 넘을 둘 다 선택할 수 없다는 건…” “…제 생각에는요… 외람된 말씀이지만… 기나 아이언이나 둘 다 지로님을 선택할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러자 지로는 허리를 쭉 펴며 얄밉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앞으로는 외람되면 말하지 마, 형제.” “…….” 자기가 말 시켜놓고는…. 치유는 ‘누가 뭐래요…’라는 표정으로 기를 한번 쳐다보았다. 기는 묵묵히 술만 마시고 있었다. 노란 선술집의 조명등과 하얀 스웨터가 눈부시게 어울렸다. 얼마나 마셨을까… 손님들을 다 쫓아낸 건방진 지로는 기지개를 피며 나가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해는 할 수 없지만 치유에게 셔터를 내리라고 말한다. 하필이면 너무나 당당하게 말하는 바람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촤르륵- 손을 뻗어 고리를 잡자, 철제 셔터가 주름을 펴듯 내려왔다. 치유는 왜 자기가 셔터를 내려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선술집 주인이나 손님인 기나 모두 그에게는 관심이 없어보였다. 그나마 셋 중에 가장 키가 크다는 게 이유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며칠동안, 치유를 너에게 맡기려고 데리고 왔어.” 기가 지로에게 말했다. 그러자 갸름한 얼굴이 자신을 빤히 쳐다본다. “내가 왜 쟤를 맡아?” “아까까지 잘 빠진 몸매에 섹시한 신부복이 네 취향이라며?” “10분 전에 생각이 바뀌었어. 예쁜 천사가 내 취향이야. 무슈 천사, 꾸냥 천사… 천사 레이디, 젠틀 천사… 이름 붙이기 나름이지.” 치유는 셔터가 내려간 선술집 앞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대화가 언제 끝나는지 궁금해 하면서…. “너는 어디 갈 건데?” 그러자 기는 다소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연을 만나러…. 그리고 수를 만나러….” “… 저 녀석 데리고 가도 괜찮아. 수는 싫어할지도 모르지만, 연은 좋아할 거야. 저 녀석은 인간이잖아?” “내가 연을 만나러 가게 되면, 아이언도 그 사실을 알게 돼. 그게 중립의 법칙이야. 나도 아이언이 류를 그곳에 데리고 갔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고….” “…한마디로, 아이언에게 저 청년까지 들키고 싶진 않다, 이거냐? 지로는 아치형의 예쁜 눈썹을 쓰윽 밀어올렸다. 짧게 한숨을 쉬며 기가 무심하게 고개 끄덕인다. “애매한 인간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어딜가나 애매한 게 문제군.” “부탁이야, 에던. 잠시만 부탁해. 치유도 낙원보다는 너네 집이 편할 거야.” 지로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지만, 그래도 ‘흐흥’이라고 짧게만 대답했을 뿐이다. 치유는 지로가 했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기는 상당히 인간미가 떨어지는 편이었다. 아니, 그에게 도대체 류가 잡혀간 일이 중요한지 아닌지조차 판가름하기 힘들었다. ***** 지로의 집에 갔을 때, 치유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도대체 발을 어디다 놔야 할지 모르겠군요.” …였다. “싫으면 천정에 붙어 있던지~” 과연 지로답다. 치유는 처음 들어서자마자 도둑이 든 건 아니었을까… 라고 걱정했는데…. “헤이… 딱딱하게 서 있지 말고 옷 좀 갈아입어. 어차피 내 옷은 맞지도 않을 것 같은데 아예 벗고 있던지….” “저도 별로 안 내키는데요.”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지로는 그나마 사이즈가 큰 옷 하나를 불쑥 던진다. 엉겁결에 받아들며 방 밑에 놓여진 신문이며 잡지들을 발로 쓰윽 밀었다. “청소 좀 하고 살아요.” 지로가 주방에서 커피컵 두 개를 들고 나오며 입술을 삐쭉거렸다. “마음의 청소만 잘 하고 살면 돼.” “… 편리하시군요.” “헤이~ 나도 좋아서 너와 있는 게 아니야. 나도 원해서 기를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해서 집이 어지러운 것도 아니야.” 치유는 그가 컵을 놓칠까봐 불안했다. 투덜거리는 예쁜 손에서 컵을 받아들고 탁자의 빈 공간에 적당히 놓는다. 유리판 마다 동그란 커피 받침 모양이 역력했다. 제발… 청소 좀 하고 살지…. “어차피 오래 있다 갈 것도 아니잖아?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고 앉으라구, 형제.” 말로써는 당해낼 재간이 없어보인다. 치유는 그저 두리번 거렸다. 막상 쇼파에는 신문과 책들이 너무 쌓여 있어서 앉지 못했다. 대신 둘 다 쇼파 아래의 바닥에 앉아 등을 기대는 쪽이 편했다. “심심하지? 우리 기도나 한판 할까?” 놀린다고 하는 말이라는 걸 안다. 치유는 떨떠름하게 커피를 마셨다. “이런 말 하기는 싫지만… 그게 더 심심할 것 같은데요.” “…동의해.” 역시나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지로는 키득거렸다. 아름답다기보다는 예쁘고, 완벽하다기 보다는 실수투성이고, 성스럽다기보다는 경박해 보이지만… 그래도 치유는 그가 좋았다. 기나 류보다는 가장 자유스러워보였다. “이름이 뭐라고 했지?” “…치유요.” “무슨 치유?” “강치유.” “이름 죽이구만! 생일은?” “19**년, 5월 30일 생.” “좋아, 쌍둥이 자리군. 나와 궁합이 맞겠어.” 치유는 믿기지 않았다. 덕분에 인상을 찡그리며 기가 막히다는 듯 쳐다본다. “무슨 천사가 별자리 궁합이나 봐요?” “점성학이 뭐? 타로카드도 볼 줄 알고, 사주도 볼 줄 알아.” “아니, 뭘 할 줄 아냐고 물은 게 아니라… 가브리…아니, 지로 님은 도무지 경건함이나 신앙심하고는 거리가 먼…” 탕- 하고 커피잔이 내려앉았다. 지로가 그 예쁜 눈을 반짝이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좋아. 원하는 모습을 말해. 변신해 줄게.” “… 진짜요?” “그래, 말 하라니까? 흰 옷? 날개? 좋아, 날개. 날개 몇 개나 원해? 왕관이라도 쓸까? 아니면… 영묘한 빛? 자, 원하는 걸 말해.” 하도 눈을 반짝거리며 말했기 때문에 치유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목에 뭔가 단단히 걸린 기분이다. 조금 말이 목에 걸린다. “아니… 뭐, 그렇다고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라… 근데… 정말 할 수 있기는 해요? 날개나 뭐 이런…” “…미쳤냐? 내가 세일러 문이냐?” 갑자기 치유는 웃음이 나왔다. 허탈하게 대답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 인간의 나이로는 자신보다 어려보이는데, 도무지 좋아지지 않을 수가 없다. 한참을 웃었다. 그의 말처럼, 지로가 세일러문 복장을 하고 있다면 너무 웃겨서 뒤로 넘어갈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소리내어 웃기 시작하자, 지로 역시 큰 소리로 웃었다. “이런 말 하기는 정말 싫지만, 웃는 모습이 정말 예쁩니다….” “…알고 있어.” “사람들이 정말 당신을 좋아할만하다고 생각해요.” “아… 그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 “… 만인이 나를 사랑해도, 내가 원하는 사람이 날 돌아봐주지 않으면… 항상 뭔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지.” 그리고 나서 지로가 씁쓸하게 웃었다. 눈동자는 여전히 반짝거린다. 치유는 다소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솔직히 말해서 반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건 그래요. 근데… 왜 하필이면 남자로 태어났어요?” “… 그냥… 편하기 때문이지. 여자로 태어났으면 이 사회의 불합리함에 나는 터져 버렸을 거야. 성질머리 때문에 인간계에 너무나 깊숙이 관여해서 ‘다 죽여버릴껴!’라고 소리쳤겠지.” “… 여자였으면 한번쯤 좋아해봤을텐데….” “…남자여도 좋아해도 돼.” 치유는 그가 짓는 밝은 미소에 덩달아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 난 말이죠…. 왜 신부가 되려고 했는지 모르겠어요.” “…음… 내가 봐도 그런 것 같아.” “…하하… 그렇죠? 전 신학보다는 과학이 좋아요. 기도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고백하는 것은 어렵죠. 항상 몰래 몰래 다른 책들을 읽고 사람들과 논쟁을 벌이다가 수사들의 눈총을 받았죠.” “… 그래서? 근데 왜 신부가 되고 싶었지?” 웃음 짓는 눈. 샐쭉하게 가늘어지는 눈꼬리…. 양탄자를 깐 바닥으로 편하게 기대어 미끄러지는 자세…. 그리고 군살없이 매끈한 어깨와 걷은 셔츠 소매 밖으로 보이는 조각같은 손목…. 그는 청바지를 입은 긴 다리를 자신의 허벅지에 올렸다. 피곤해 보였고, 또 한편으로 편안해 보였다. 치유는 나른해 보이는 얼굴을 보며 쓰게 웃었다. “… 우스운 말처럼 들리겠지만… 딱히 잘 하는 게 없었어요.” “…….” “… 십대 때는 다른 녀석들이 관심을 갖는 여자들에게도 관심이 없었고…” “…….” “… 그다지 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현실 세계에는 나를 잡아주는 게 없었어요.” 유일하게 잘 하는 게 있다면 짓궂게 장난을 치고 직설적으로 말해버리는 거죠. “매력적이군.” 그러나 지로는 자신의 말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의외로 남자가 좋은지도 모르지.” 붉은 머리카락이 몇 가닥 정도 그의 얼굴로 내려왔다. 뭔가… 쓸어넘겨주고 싶은 건 그냥 착각일지도 모른다. 치유는 대화에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그랬으면 신부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을 걸요?” 조금 강경한 자신의 말에 지로는 웃었다. 여전히 머리를 넘겨주고 싶었다. 그가 너무나 느슨하게 누워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에 대해 자꾸만 단정하는 건 나쁜 버릇이야, 형제.” “…….” “신을 함부로 단정하는 것도 나쁜 버릇이고. 그렇게 이야기 한다면 아무 것도 이뤄지지 않아.” “하지만…” 치유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로에게만은 공격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뭔지는 몰라도, 그의 자세나 그의 밝은 성격, 그리고 그 환하고 매혹적인 웃음 이상으로 그는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기의 안정적이고, 류의 초연한 태도와는 다른…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천사의 일부분, 지로… 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어요.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도 없구요. 아시잖아요?” 부드럽고 곤혹스럽게 말하자 지로가 상체를 조금 일으킨다. 그 쯤에 치유는 도저히 못 참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생각보다 행동이 빨랐다. 무의식적으로 손을 불쑥 뻗은 것이다. 정말 본능적이었다, 내내 거슬리던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준 것은. “……!!!” 그러나 순간적으로 지로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겼을 때, 조금 정신이 들고 만다. 굉장히 난처했다.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아니… 저는 그냥…” “…그냥 뭐?” 조금 열려진 셔츠가 어깨 쪽으로 밀려나 있었다. 시원하고 매끄러운 상체가 엿보인다. 귓불을 뚫은 작은 이어링은 숨 가쁘게 빛나고 있었다. 치유는 당황했다. 상대방이 너무나 가까이서, 그리고 정면으로 쳐다보며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설명해 줬으면 좋겠는데…” “……???” 배시시 웃는 눈초리… 검고 숱 많은 속눈썹. 저절로 마른 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러자 그 모습을 놀리듯 지로는 더욱 환하게 웃음 지었다. “굉장히 다정한 마음이잖아, 형제.” “…아니, 그게…” “…그러니까 설명해 줬으면 좋겠어. 그가 그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를…” “……!!!” “그녀가 그녀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가 또 뭐지? 그가 그를 사랑하면 안 되는 이유는?” 두근 두근- 낮고 갈라진 음성이었다. 밝고 경쾌했던 지금까지의 목소리보다 더 매혹적이었다. 치유는 훅- 하고 짧게 숨을 들이마신다. 지금까지 한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뭔가 심하게 몸 속에서 뒤엉키는 기분이었다. 지로는 그것을 즐겁다는 듯 응시하고 있다.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어디까지나 지로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당겼기 때문이지만… 몸이 휘청, 그를 향해 기운다. 반쯤 누워 있는 그와 부딪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어떻게든 대답하려 애쓴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치유는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 필사적이었다. “안 된다고 하니까요….” “글쎄, 누가?” 따박 따박 캐묻는 입술이 붉었다. 치유는 어쩔 줄을 모르며 남은 한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브리엘 님…” “내 이름은 지로야.” “…뭐라고 불리던… 암튼 제 손 좀 놔 주시죠….” 아슬 아슬하다. 뭔지는 몰라도 심장이 마구 일렁인다. 치유는 자신의 목소리가 듣기 힘들 정도로 갈라졌다는 걸 알았다. 점점 더 난처해지는 표정이 될 수록 지로는 즐거운 것 같았다. 그 쵸핏한 눈이 반짝- 하고 빛나더니 점점 웃음이 번져갔다. 치유는 어쩔 줄 모르며 입을 벌렸다. “저기…” 그 순간이었다. 숨이 가빠오고 시야가 검은 눈동자로 꽉 찬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이 꽉 닫힌다.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비되고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귀가 아플 지경이다. “……!!!” 그리고… 정말 믿기지 않지만 지로가 입을 맞췄다. 그러나 자신의 입술이 아니라, 입술 끝에 놀리듯 살짝 입을 맞췄다. 숨이 꽉 막힐 정도로 생생한 감각이다. 부드럽고 촉촉하고, 놀리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굉장히 애가 달게 만든다. 입술의 점막이 뜨거워지고 식도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아아…, 이런 기분은 정말 처음이다. 뭔가로부터 끝없이 도망치고 싶으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갖고 싶어 미치게 만드는 이런 기분은…. 다소 넋을 잃고 고개를 돌리자, 바로 눈 앞에서 지로가 웃었다. 얄미울 정도로… 정말 한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인 미소다. 순간적으로 치유는 손을 뻗을 뻔 했다. 폭력을 쓸지, 아니면 키스를 하고 싶은지는 스스로도 분간이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둘 다 해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내가 이야기를 하나 해 주지.” “…….” 그러나 지로가 조금 얼굴을 뒤로 물리며 입을 열었다.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에 치유는 침만 꿀꺽 삼킨다. “당신이 방금 한 말들과, 당신의 친구 류, 그리고 기, 마지막으로 나까지 관련된 이야기야. 천상의 오래 된 금서에도 적혀지지 않은 이야기고…” “…….” “…어쩌면 당신도 이제 알아야 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니까. 그가 그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에 대해서지….” - 라고…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지로가 말했다. 한동안 멍하던 치유의 정신은,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때야 조금 맑아지기 시작했다. *****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던 쉽게 이야기 해 줄게. 내 이름은 에던. 낙원의 이름으로부터 나왔지. 먼저 이 이야기에는 배경이 필요해. 이야기는 현재의 인류보다 더 앞선 세대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50억년 된 지금의 지구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다른 인류가 있었어. 사실대로 말하자면 12번의 인류가 나타났다가 소멸됐어. 지금은 13번째 이니까. 현재의 사람들은 그 12번째 인류 세대를 막연하게 기억하고 있지. 우리는 이 12번째 인류 세대를 주로 ‘아틀란티스’라고 불러.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있어. 지진이나 해일, 혹은 신의 노여움을 샀던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일들… 그 모든 게 아틀란티스를 회상하게 만드는 이야기야. 하지만, 아틀란티스는 지금의 인류보다 훨씬 발전한 과학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물질 과학 뿐만 아니라, 영적 과학에 능한 세대였지. 현 세대의 인류에게 넘어온 프리메이슨이나 이집트, 그리스의 놀라운 문명들, 설명할 수 없는 미스테리 서클(*주로 외계인이 남긴 것이라 여겨지는 넓은 대지의 미스테리한 모양의 그림), 그리고 사라진 제국의 전설 마야와 잉카 문명들이 아틀란티스를 비교적 정확히 설명하고 있어. 아틀란티스는 사실 지금까지의 인류 중에 가장 완벽하게 신의 나라를 건설할 제국이었어. 그러나 우주 에너지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신성함의 대표, 신(神)에게 결국 버림받아야 했다. 그들 자신의 잘못된 선택들 때문이지. 그런 아틀란티스가 망하기 직전에, 인간의 세계에는 이름 높은 예술가이자 제사장이 하나 있었어. 그의 이름은 연. 당시 그의 영적인 도력은 매우 높아서, 그는 더 이상 환생할 이유가 없다고 여겨졌지. 한마디로 아틀란티스가 끝나면 더 이상 연의 영혼은 인간계나 신성계가 아닌 더 차원 높은 세계로 이동한다고 여겨졌어. 어느 누구도 이제 그를 보기 힘든 거지. 환생이란, 뭔가 다음 생애에서 이루고자 하는 게 있는 인간의 영혼만이 할 수 있었거든. 그러나 연은 그럴 필요가 없었지. 그리고 어떻게든 다른 사람들이 신을 반역하는 걸 막으려고 애썼지. 이런 연이 섬기는 두 성족의 사자들이 있었어…, 그 두 사자의 이름이 바로 아이언과 기였다. 기의 원래 이름은 길리언. 두 천사는 쌍둥이 천사지. 성족의 전사들로, 천사 미카엘의 영혼에서 분리되어 나왔어. 연은 신성함을 섬기며, 이 두 천사를 위해 일하는 제사장이었지. 또한 연이 제사장을 할 무렵에, 아틀란티스에서는 가장 명망이 높았던 위대한 예언가가 하나 있었는데… 그의 이름이 바로 ‘류’. 그 역시 신을 섬기는 자였지. 그는 당시 사제였어. 그리고 마침내, 아틀란티스가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발표되었지. 그 쯤에 인류는 크게 통곡했지만, 그나마도 몇 안 됐어. 살아있는 자들의 대다수는 마족들의 편이었거든. 아틀란타 대륙이 큰 지진과 해일로 가라앉으리라는 걸 알아챈 류는, 남아 있는 신성한 아카샤를 모두 끌어모아 다음 세대를 위한 예언을 하나 해냈어. 어차피 그 길 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류가 남긴 예언의 내용은 성족에게 전달되었던 거야. ‘사자(使者)의 서’라고 이름이 붙여진 이 예언은 지금도 미카엘이 가지고 있지. 종이로 된 책이 아니라, 미카엘의 아카샤에 기록된 거야. 아키식 레코드… 인류의 모든 비밀이 담겨진 무의식의 공간이지. 종교적인 말로는 ‘성령’이라고도 불려. 오직 허락된 자만이 이 사자의 서를 읽을 수 있는데, 예언가는 그 ‘허락된 자’들을 모두 여섯으로 말했어. 절대선, 절대악, 인도자, 예언자, 주술자, 치료자…. 이렇게 여섯이었어. 6은 신성한 숫자야. 뭔가를 창조할 때 필요한 숫자가 바로 6으로… 성서에 의하면 신도 6일동안 세상을 만들고 마지막 7일 째 쉬셨다고 하니까. 거의 모든 종교에서 6은 창조와 새로운 것에 관련된 숫자야. 그러나 신의 완성형 숫자인 7에 하나가 모자라는 바람에, 악마의 숫자로 불리기도 하지. 숫자 ‘6’은 그래서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숫자야. 그리고 이 여섯이 모두 모일 때만 ‘사자의 서’를 열어볼 수 있다고 말했지. 한마디로 예언자 류는 위대한 예언 ‘사자의 서’를 인간과 성족들을 위해 주었지만, 약속된 시간이 올 때까지는 열어볼 수 없게 봉인 한 거야.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몰라. 어쨌든, 예언가 류는 6개의 영혼을 이야기 했어. 아틀란티스가 멸망하더라도, 다음 번 13세대 인류는 또 시작할테고… 그 때는 아틀란티스처럼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한 거야. 실제로 지금 인류의 대부분은 아틀란티스 시대 때의 사람들이 환생했지. 그래서 놀랍고 빠른 과학적 진보와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 환상과 상상들이 넘치는 세상을 만들고 있지. 13세대 인류가 12세대, 아틀란티스처럼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인류가 이미 태초부터 외면하고 버렸던 마족들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서… ‘사자의 서’는 필요한 거야. 그러나 열어보기 위해서는 아직 시간이 걸리겠지. 더군다나 마족들에게 뺏길 위험도 있고… 류가 스스로 걸었던 봉인을 풀려면, 그가 제시했던 6개의 영혼이 모여야 해. 거기까지는 순조로웠어. 류가 제시한 6개의 영혼 중에 ‘절대악’을 빼 놓고는 모두 성족이나, 중립이었거든. 한마디로 13세대 인류, 현존하는 지금의 인류는 그렇게만 진행된다면 성족의 편이 되어 성족의 에너지를 크게 만들어 줄 수 있었어. 문제는… 이 ‘사자의 서’를 받으러 간 아이언에게서 시작되었어. 아이언은 류의 수호 천사였거든. 수호자였지. 사실 냉철하고 강한 아이언이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 쯤에 모두가 짐작을 했지. 아이언이 신성한 성족의 계율을 어기고 있다는 낌새를 말이야. 그는 류를 사랑했지…. 그건 신성한 동맹의 약속을 어긴다는 의미였어. 신성한 계율을 어긴다는 건 중요한 의미였어…. 엄연히 계(界)가 다르고 계급이 다른 인간과 천사가 사랑에 빠지면 그건 문제가 됐던 거야. 당시 아이언은 인간의 몸을 빌린 것도 아니었어. 아틀란티스 시대 때까지는 그는 인간의 몸을 빌릴 필요가 없는 최고의 위치였거든. 당연하지, 그의 형제가 미카엘이니까. 적어도 인간을 신성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자유였겠지만… 아이언은 표를 내는 편도 아니었고… 아니, 사실은 그 자신도 아마 몰랐을 것 같아. 스스로를 부정하는 편이 훨씬 편했을 거야…. 만약… 류가 죽기 직전까지 순결한 예언자 행세를 했더라면 지금까지도 아이언은 류의 수호자였겠지. 하지만 류는 그러지 않았어. 인간이었으나, 신성이 높은 류는… 아마도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시험이었겠지만… 하필이면 아이언의 형제였던 기를 사랑했지. 그는 신성이 아니라, 신성을 전하는 기를 사랑했던 거야. 그때도 약간은 지금과 비슷해서… ‘그’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조금의 ‘금기’에 속했어. 특히나 신성에 자신을 봉헌한 류에게는 완벽한 금기였지. 일종의 우상숭배잖아? 신보다 천사를 사랑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 아이언에게도 마찬가지였어. 모두가 숭배하자는 의미로 만든 ‘신’인데, 류와 아이언은 각각 다른 상대를 사랑하고 만 거지. 둘 다 금기에 접근했던 거야. 괴로워했던 류는… 아마도 정말 오랜 시간 괴로웠겠지만… 어쨌든 아이언이 ‘사자의 서’를 받으러 온 그 날… 그에게 부탁을 했지. ‘자살’과 ‘우상의 숭배’는 아틀란티스의 수도원에서도 금지였는데… 류는 그 두 가지를 다 하고 싶었던 거야. 자살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고… 사자의 서를 넘기므로 인해서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여겼기에 목숨을 끊으려고 한 거지. 그러나 자살만은 어떻게든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류는 아이언에게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어. … … 그래서 어떻게 했을 것 같아? … … … 지금도 역시 아이언의 마음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가 이해가 가. 만약, 나라도… 어쩌면 나라도 자신이 수천년 동안 아기로서 축복하고 죽음으로서 거둬들였던 사랑하는 영혼을 외면하진 못했을 거야. 아이언은 그의 삶과 죽음의 모든 여정에 늘 함께였지. 그러니 어떻게 갈등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그는 그가 만들어진 이례 최초로… 판단력을 잃었어. 우리는 미친 아이언을 처음 본 거지…. 자신조차도 스스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사랑’을… 죽음과 바꿀 정도로 강렬하게 품었던 류가 미웠을 테고… 그러면서도 잔인하게 자신을 몰아세우는 그가 더 미웠을테고… 그리고 그런 류가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 기라는 것에 더 분노했겠지…. 아무튼… 그런 이유로… 아이언은 류를 죽였어. … 그가 가진 정의의 검이 파멸의 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지. 당시 환생계의 일인자이자, 성족과 친했던 중립자… ‘유퍼’는 아이언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형제인 기가 그를 말리기 위해 내려왔을 때, 오랫동안 신성했던 제단은 살육의 현장이 되어 있었지. 아이언은 류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를 죽인 거야. 그 일로 인해 그는 영혼의 존재에서 ‘영원히 소멸’되는 위기가 닥친 거지. 소멸은 죽음과 달라.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지. 아무 것도 없어지는 거야. 애당초 아이언이라는 존재가 있었는지도 기억치 못하게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후에… 류가 드디어 제 13세대 인류, 그러니까 지금의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위해 빛나는 신성 앞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어. 그는 아틀란티스 때 스스로가 예언했듯이, 현 인류에 환생하기로 결정 내렸어. 그 자리에는 많은 영혼들이 있었지. 류의 결정에 따라 나머지 인연들도 결정을 내리는 거니까…. 그가 앞으로 일어날 모든 예언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모두가 있었어. 신성한 제단 앞에… 미완성이자 불완전한 모든 생명체를 지배하는 우주의 대표자 ‘신’의 앞에… 아이언, 기, 유퍼, 연, 그리고 나…. 만약 그 자리에서… 류가 자신의 수호천사로 여전히 아이언을 지목했다면… 아이언은 그 자리가 합당한지 심판받았어야 했어. 심판이 이뤄졌다면 아이언은 ‘소멸’될 위기였지. 그러나 소멸조차도 그를 말리진 못했어. 그가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훨씬 큰 것이었거든. 오랫동안 사랑해왔던 류가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 둘 다 금기였지만, 차라리 그 금기가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아이언에겐 못 견디는 상처였지. 그래서 아마 천사가 해서는 안 되는 일 중에 하나인 살인까지 했었겠지. 그 쯤의 그는 거의 미쳐서, 신성을 모독하는 살인죄라도 별 거 아니었던 셈이야.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어. 아마도 아이언이 소멸되지 않도록 류가 베푼 마지막 친절이었겠지만… 류는 자신의 수호자로 아이언이 아니라 기를 선택했어. 아이언에게는 더욱 잔인한 일이었지. 류를 위해 신성을 모독했는데, 류가 다시 자기를 버린 거야. 그에게는 류가 자신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았어. 알려줄 기회조차도 없었지. 아이언은… 그 이후부터는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치유… 아이언은 그가 기를 지목하자마자 심판의 제단 앞을 떠났다…. 스스로가 수많은 사람을 죽인 검으로… 자신의 신성함과 선함을 상징했던 날개를 자르고… 제단 앞의 류를 쳐다도 보지 않고 그대로 걸어나갔지…. 그는 자신을 외면한 류도, 류가 선택한 성족도 돌아보지 않았어. 대신 아름답지만 영악한 루시펠에게로 가서 자신의 영혼을 팔았지. 한 때 미카엘에 의해 마계에 봉인되었으나, 아틀란티스 사람들의 영력으로 가까스로 밖으로 나온 루시펠은 기꺼이 그를 환영했어. 그렇게 해서 그는 마족의 사람이 된 거야. 그리고 그 쯤의 류는 환생으로 가는 망각의 강을 건너갔지…. 아무도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몰라…. 오직 망각의 강을 다스리는 유퍼만이 강하게 분노했지. 환생계의 대표이자, 환생을 주관하는 신인 유퍼리어는 크게 분노했지. 그는 아이언을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유는…… 그 역시 기를 사랑하고 있었거든…. 말하지 못하고, 말해서는 안 되는 감정이었지만… 어쨌든 유퍼는 그랬어. 류가 기를 선택하므로 해서, 버림받은 영혼이 두 개가 된 거야. 아니지… 사실은 세 개야. 류를 사랑했던 아이언과, 기를 사랑했던 유퍼와, 그런 유퍼를 사랑했던… 에던이 있지. 그 에던이 나야. 예지의 천사, 지혜와 자비의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나왔지만… 나는 류가 예언했던 여섯 개의 요소 중에 들어가지 못해. 나는 류에게도 선택받지 못했지만, 유퍼에게도 버림받았지. 유퍼가 기에 대한 분노와 아이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마계로 건너갔거든. 나는 사실 갈 곳이 없어서 기를 따라 내려온 거야. 이렇게 조각나고 있었던 우주는 완전히 분열됐다. 에너지를 잃고 있던 마계는 아이언과 유퍼리어의 연합으로 더욱 커졌고, 신성계는 고립되었고, 인간계는 아틀란티스를 바다에 묻고 기억을 잃은 채 다시 시작된 거야. 남은 것은 각각이 환생해서 유일하게 그 시대 때 남겨진 단서인 ‘사자의 서’를 여는 일이었지. 먼저, 한 때 전생과 환생을 연결했던 인도자가 절대악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태어났어. 그가 인도자였으니 그를 시작으로 마지막 치료자까지 태어나는 게 순서야. 그렇게 해서 인도자 유퍼가 태어났지. 그 다음에 한 때 예언가를 키웠던 그 시대의 제사장인 주술가 연이 태어났고, 주술가 연의 인도를 받으며 예언가 류가 태어났지. 네 번째로 절대악 기령이 예언가 류를 없애기 위해 인간으로 태어났고, 절대선 기가 그것을 막기 위해 다시 인간으로 태어났지. 마지막으로 같은 아틀란티스 시대 때 방랑하는 예술가였고 다른 시대 때는 과학자였으며…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류의 친구였던 다니엘이이라는 영혼이 치료자로 태어났어. 우리는 지금 치료자를 찾고 있어. 그가 가장 마지막에 필요한 구원자야. 정보에 의하면, 마족들은 이미 치료자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는 더욱 애가 탔지. 어지간해서는 주술가이자 마법사인 연을 찾아가지 않지만, 이번에는 좀 다급하지. 류를 빼앗겼고, 치료자를 찾지 못했으니 말이야. … …근데 … … … … 지금 자냐, 치유? … … <신성모독 神聖冒瀆 6.> 너무 깊은 잠에 들었나 보다. 류는 반짝- 하고 눈이 떠졌다. 사실은 허리와 그 아래의 통증을 이길 수가 없어서 였다. 약간은 머리가 아프고 눈 앞이 어지러운 게, 아무래도 열이 심각한 것 같았다. 작게 신음을 내며 류는 몸을 뒤척였다. 그러다가 손 끝에 걸리는 이방인의 느낌, 그 낯설음에 눈이 떠졌다. “……!!!” 눈 앞에는 타인의 팔이 보였다. 어깨에서 시원하게 뚝 떨어지는 미끈한 팔은, 군살없이 아름다웠다. 약간의 다갈색 피부, 그리고 팔뚝에 그려진 검은 문신을 멍하니 바라고 있으니 갑자기 찬 얼음을 맞는 듯 소름이 끼쳤다. 기령이다. 류는 갑자기 숨이 막히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그 때서야 그가 지난 밤 동안 자신에게 무엇을 했는지가 떠오른 것이다. 이불을 조심스럽게 당겨서 열이 오르는 몸에 감고,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그는 정말 짧은 시간 동안 고민했다. 이대로 잠든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라고. 아니, 그가 정말 잠들어 있다면… “만약…” 그러나 이런 악마가 잠들었을 리가 없다. 류가 고통과 분노로 차갑게 노려보는 사이,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속눈썹 사이로, 반짝- 검은 눈동자가 빛난다. 그는 류의 감정과 살기가 재미있다는 듯 누워서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 나를 없애고 싶다면…” “…….” “…너의 능력을 먼저 찾는 게 좋을 거다, 류. 그것도 아니라면…” 류는 살짝 몸을 뒤로 뺐다. 오슬 오슬 오르는 열과, 몸 구석 구석에 남은 수치감… 그리고 허벅지 아래에 말라붙은 체액의 덩어리들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지나친 충격으로 자신이 약간 미친 게 아닐까- 라고 고민하기 이르렀다. 그러나 기령은 애당초 그런 것에 신경 쓸 존재도 아니다. 그는 상체를 일으키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자신의 검은 셔츠를 들어올렸다. 쓰윽- 팔랑이던 셔츠의 소매 끝으로 팔을 넣고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일어선다. 그쯤의 류는 ‘인간의 살기’란 어떤 건지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감정이 격해지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그것을 표내지 않을 정도로 그는 스스로를 제어할 힘이 있었다. 어떤 일을 겪었다 해도 악마에게 자신을 팔 생각은 없었다. 이런 일은 그냥 ‘시험’일 뿐이고, 언제나처럼 초연하게 반응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라 믿었다. 그런 마음을 더욱 놀리거나 짓밟기를 원해서 일까- 기령이 셔츠와 바지를 입은 후에, 웃음끼 없는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중요한 비밀을 알려주지.” “…….” 이번에는 류도 피하지 않았다. 그저 어제 밤에 하도 깨물어서 군데 군데 뜯겨진 입술을 다시 꽉 물고 있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잃어버렸던 인간의 감정처럼, 독기가 밀려 나온다. 더군다나 어지러울 정도로 생생한 꿈속의 말들도 떠올랐다. 꿈속에서 유퍼가 했던 말들이 진실이라 해도, 혹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지만, 자신이 기억나지 않은 때에 그런 일이 있어다 해도… 류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 겪고 있는 인간의 감정이었다. 그가 내미는 어떤 유혹의 과일도, 혹은 악마의 제안도 필요없었다. 류는 기령에게 그것을 말하고 싶었고, 때문에 강한 눈길로 코끝까지 다가온 기령의 얼굴을 피하지 않았다. 무표정하고 무심한 얼굴, 그 얼굴의 기령이 류의 초연함을 비웃는 듯 입술이 거의 닿을 듯한 거리에서 속삭였다. “중요한 비밀이야, 류. 나도 가끔 잠이 들어.” “…….” “다만 인간처럼 오래 잠들지는 않지. 다음 번에 정말 나를 죽이고 싶다면…” “…….” “그 기회를 잘 잡아. 이번에는 네가 나를 죽일 수 있는지 한번 시험해 보자구, 우리.” “……!!!” 그의 목덜미에는 날카로운 손톱자국이 있었다. 활짝 열려진 셔츠 안 쪽의 쇄골에도 온통 긁힌 자국이었다. 류는 그것이 누가 남긴 것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닫자, 숨이 조금 차올랐다. 그런 류의 당황함을 즐기듯 바라보던 기령이 곧이어 차갑게 몸을 뗀다. 검은 셔츠의 자락이 나풀거렸다. 방의 휘장을 걷고 나가는 유려한 등이 보인다. 류는 그 때서야 질식할 것 같은 상황에서 벗어났다. 휴우- 하고 낮은 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류가 힘겹게 옷을 입고, 끙끙거리며 힘든 몸을 일으키는 순간, “……!!!!!!” - 돌아서던 그는 기둥처럼 얼어붙었다. 믿을 수 없고, 믿기지 않지만… 갑자기 요 며칠 사이에 익숙했던 방안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바닥이 진동하고 공간이 휘익- 하고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마치, 지구가 자신만 남겨놓고 자전하는 느낌이다.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이 일 정도다. 류는 믿을 수 없는 마음으로 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곳은 갇혀 있는 낡은 건물이 아니었다. 오래된 벽지나 내려뜨리는 휘장, 그리고 좁은 복도와 낡은 계단 같은 것도, 나무로 만든 테이블과 창문도 없었다. 그저… 보이는 것은 생소한 건물의 내부다. 바닥을 내려다보자, 어느새 푸른 색의 대리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원자재가 뭔지 알 수는 없었지만, 하얀 옷을 입은 류 자신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제 기령이 무작정 들어온 이례로 계속 풍기던 어지러운 사향의 냄새도 없었다. 대신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금은 슬픈 듯 느껴지는 묘한 향이 은은하게 서려 있었다. 무엇보다 창도 거의 없는 방에 굉장히 밝아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도 빼 놓을 수 없다. 류는 몇 번이나 눈을 깜박였다. 방은 좀 전보다 너무나 넓어지고 깨끗해지고 밝아져있다. 이 곳은 자신이 갇혀 있는 마족들의 건물이 아니었다. 유리로 만든 고급스러운 테이블 위에는 종이가 있었고, 종이에는 막 적단 만 펜이 나뒹굴고 있었다. 몇 번이나 눈을 깜박이던 류는 이것이 현실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겨우 움직였다. 오직 허리에 이는 끔찍한 통증만이 꿈이 아니라는 증거 같았다. 가까스로 손을 뻗어 테이블 위의 펜을 잡는다. 벽에는 이상한 모양의 시계가 돌아가고 있었고, 보라색의 꽃들이 열려진 창을 통과하고 있었다. 열려진 창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미풍조차 생생하다. 펜을 잡자, 시원하고 둔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류는 잠시 망설이다가 펜을 잡은 채, 펼쳐진 종이로 고개 숙였다. 그러나 그 순간, 갑자기 등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 류가 놀래서 뒤로 돌아보자, 유퍼가 서 있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유퍼가 아니었다. 그를 보자마자 어젯밤 꿈에 대해 이야기 하려 했던 류는 까마득하게 정신이 멀어지는 기분이다. 유퍼가 서 있는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마치 새 페인트가 벽에서 떨어져나가듯 다시 공간이 바뀌고 있었다. 아주 느린 속도로, 그리고 마치 먼지가 날리 듯… “유퍼…” 마치 혼령처럼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유퍼가 미심쩍은 듯 입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저기, 유퍼…” 그가 설명해 주길 원했다. 그들이 마력으로 이런 요상한 마법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눈 앞에서 장막이 벗겨지듯, 아름다운 공간이 다시 우울하고 낡은 옛날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독하게 혼란스러운 자신의 표정을 보며, 유퍼는 고개 저었다. “무엇을 보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는 같은 게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과 다른 것을 봅니다.” “……!!!” “… 아마도 당신에게 그 날의 기억들이 천천히 돌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제 밤 우리들이 꿈 속에서 만난 이후로…” “……!!!” “… 예언의 힘이란, 과거를 자각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 같은 일이 여러 번 생길 겁니다, 류.” 마지막 한 조각의 과거, 유퍼의 말대로라면 과거의 그림자가 현실에서 벗겨질 때까지 류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더욱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날의 기억들이라는 게 뭐길래, 그 날의 내가 마지막으로 본 세상은 그렇게 아름답고 성스러운 공간이었을까- 라고. 정작 자신은 유퍼가 해 준 말들 외에는 별로 떠오르는 게 없는 것 이?다. ***** 기령은 유퍼가 잔소리 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후회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일말의 양심같은 건 저 세상에 버려놓고 온지 오래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그러나 유퍼는 이상하게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자신을 따라 마계로 건너왔지만, 인간으로 먼저 태어나 자신을 거둬 길렀지만, 그가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는 적어도 아직 천계에 있을 때의 아이언을 믿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니 이런 종류의 일에는 응당 잔소리가 따라올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유퍼는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으로 무심하게 서 있었다. “아이언님…” 그 쯤에 연으로부터 채널링이 있었다. 일종의 교신이었다. 연이 보내온 소식은 간단했다. 「기가 찾아왔습니다. 길리언, 당신의 형제가 찾아왔습니다. 」-라고. 언제나 부드러운 연의 성격다웠다. 기령은 주먹을 쥐었다 피며 다시 싸늘하게 유퍼를 쳐다보았다. 왜 유퍼도, 그리고 연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건지 화가 났다. 한번 등 돌린 낙원은 절대 돌아갈 수 없다. 유퍼나 연도 분명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설득하려 한다. 기령은 그들이 가끔 보여주는 지난 시간의 따뜻함들이 싫었다. “아이언님…” 연으로부터의 교신이 끊어진 후에, 유퍼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기령은 입술에 걸린 작은 링을 만지작거렸다. 무심하게 쳐다보았을 때, 유퍼는 꽤 복잡한 표정이다.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표정과는 반대로 심플했다. “……!!!” “…당신과 류에 대한 모든 기억이….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돌아왔습니다. 다른 건 기억이 안 나지만, 그 날 있었던 일들은 생생히 떠오릅니다. 당신들이 왜 그랬는지도요.” “……!!!” 기령은 벌떡 일어섰다. 유퍼는 원래 중간계인 ‘환생계’에서 일하는 인도자였고, 때문에 그가 중립을 버리고 마계로 건너왔을 때도 보다 부드러웠다. 더군다나 인간으로 먼저 태어났지만, 원래 중립이었던 유연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인도자의 역할이고, 기령을 인도하기 위해 태어났다는 게 전부였다. 오늘 아침이 오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다. “무슨 뜻이지?” 초인간적인 존재인 자신과 기는 태어날 때부터 기억을 잃지 않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던 기억까지 생생했다. 그것이 절대선과 절대악의 운명이었다. 그들은 천사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자신들을 제외한 나머지, 유퍼와 류와 연은 살아가면서 기억을 되찾는 편이다. 연의 경우는 신성함의 반항자 에던이 그 기억을 살려놓았다. 그는 그 업으로 인간으로 태어나야 했다. 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퍼와 류는 언제 기억을 찾을지 알 길이 없었다. 이름만이 알려진 치료자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퍼가 오늘 자신의 기억을 되찾았다고 선언한 것이다. 기령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유퍼….” 짧고 단호하게 부르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유퍼는 입을 열었다. “6명이 모두 모인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이언.” “…….” “…이제야 예언의 내용을 이해했습니다. 6개의 영혼이 모인다는 말은…” “…….” “…6명 모두가 기억을 되찾는다는 말입니다. 당신과 기를 제외한…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주술가였던 연을 제외한… 나머지 셋, 저와 류와 치료자… 이렇게 셋에 대해서 말입니다.” 기령이 설명을 더 하라는 식으로 눈썹을 올렸다. 그 건방진 표정을 보며 유퍼는 조심스럽게 시선을 피한다. “처음 저의 존재는 당신이 설명을 했고…” “…….” “…류 역시 기에게 설명을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겪은 과거가 앞으로 펼쳐질 일들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아아…” 유퍼는 이상한 웃음을 지었다. 기령은 그가 그렇게 웃는 것도 싫었다. 그는 방금 잊었던 뭔가를 떠올리고는 회상에 찬 표정이었다. “…제가 기를 사랑했군요…. 그렇죠?” “…….” “방금 기억났을 뿐입니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감정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 “…이상한 것은… 그 시대 때의 당신과 류, 혹은 기나 연도 분명히 떠오르는데… 유독 저 자신에 대해서만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제가 알 수 있는 기억은… 제가 환생하기 전에 환생계의 신이었다는 점과… 당신의 형제 기를 사랑했다는 것 뿐입니다.” 기령은 피식 웃었다. 조소어린 미소였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는 기억을 찾았다. 그와 류가 모두 기를 사랑했고, 단지 두 사람의 선택이 달랐을 뿐이다. 유퍼는 그 사실을 기억해낸 것 같았다. “…류도 기억을 찾았습니다.” “……!!!” “아니, 찾아가는 중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저처럼… 정작 중요한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은 빼고요….” 기령은 잠시 냉정함을 잊었다. 뚫어질 듯 유퍼를 노려보게 된 것이다. 기억을 찾는다고? 그가? 유퍼가 하듯이,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은 가장 나중에? 자신을 뺀 다른 사람들의 기억이 돌아온다고? “유퍼…” 기령은 낮고 깊게 그를 불렀다.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보았다. 그는 유퍼가 짊어진 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내가 천계를 떠나오고, 나의 형제들을 반역할 때…” “…….” “…나는 우리들의 신이 우리를 버렸다고 생각했다. 신은 언제나 위대한 빛이요, 진리였을 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 “굶주린 자들에게도, 헐벗은 자들에게도, 상처입은 자들과, 피투성이 자들에게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제단 위의 신은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졌지만…” “…….” “…그가 인간들과 그 모든 감정들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나는 이미 신이 충분히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유퍼의 단정한 눈매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기령은 의자에 앉아 쓰게 웃었다. “그리고 류가 제단 앞에서 그런 선택을 하고…” “…….” “…내가 날개를 잘랐을 때도, 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나에겐 죽은 신은 필요 없었어…. 나는 신이 차라리 나를 벌하거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거나… 쫓아내길 원했었다…. 그러나 결국은 내 발로 걸어나가게 만들었지.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아무 것도 행동하지 않은 것은… 그것이야 말로 가장 잔인한 짓이지. 그동안의 신은, 나나 루시펠에게 벌도 내리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여겼다.” 유퍼가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그는 조금 전의 혼란을 버린 채, 다시 진지하고 조용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도 그렇다고 여겼기 때문에 마계로 갔었습니다.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을 억누르면서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하는 신은…” “…….” “…제게도 필요 없다고 여겼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기를 원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것을 외면하는 신은… 저에게도 필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라고 그가 중얼거렸다. 유퍼의 손을 무심결에 잡았다. 따뜻한 인간의 피가 흐른다. 그는 자신의 목덜미와 쇄골 근처에 난 날카로운 상처를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 눈빛이 너무나 자비롭고 아련해서, 기령은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신은 우리들을 포기한 게 아니었습니다.” “…….” “…이거야 말로 가장 혹독한 체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언.” “…….” “…상처 입은 자만이 상처를 기억하게 만드신 겁니다… 그렇죠? 정작 그 상처를 준 사람은 당신을 잊었는데…” 유퍼의 시선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기령은 잠시 숨을 들이 쉬었다. 그가 기억을 되찾아간다는 말은 틀린 게 아니었다. 그는 과거 한 때, 환생계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던 인도자였었다. “과거를 기억해내야만 미래를 알 수 있게 만드는 업의 고리다…” 유퍼의 조용한 시선을 바라보며 기령이 말했다. “가장 사랑했던 기억을 가장 마지막에 되찾을 수 있게 해 놨지.” “…….” “…망할 신이 주었던 형벌이 그게 아닐까? 너도 류도, 그리고 이름모를 치료자도… 모든 것을 기억해 내는 순간조차도…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기억은 가장 마지막에 떠오르는다는 것.” 유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지만,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자신에게 비추어 보아, 아마도 그럴 것 같았다. 류만 하더라도 유퍼라는 이름과 그의 역할을 기억해 냈지만, 정작 그 시대 때, 그 날의 자기 자신은 전혀 기억치 못하는 상태였다. ***** 기는 돌담 계단에 앉았다. 눈 앞으로 연의 마당이 펼쳐졌다. 해가 부드럽게 떠서 마당에 그림자를 만드는 중이다. 새들이 울고, 돌담을 두르는 대나무들이 아름다웠다. 그는 잠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당 위로 솟은 마루에 쳐진 발을 돌아보았다. 얼기 설기 엮여진 발에서는 넝쿨의 향기가 나고 있었다. 그 대나무 발 때문에 안 쪽에 앉은 사람의 모습은 희미하게 보였다. 그러나 언제나 은은하게 풍기는 묵의 냄새가 그가 누군지를 알게 만들었다. 주술가 무연이었다. “류에게 무슨 주술을 거신 겁니까.” 기의 한마디에 안에서 맑은 목소리가 대답했다. “아무 것도. 단지 그가 자신을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왔을 뿐입니다. 돕는 것 자체는 신성을 모독하는 게 아니겠지요…. 저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니까요.” “…제가 좀 더 일찍 연에게 오지 않은 게 후회 되는군요. 그랬으면 류는 신성한 기운 아래에서 기억을 되찾을 건데요.” 그러자 드리워진 발 안 쪽에서 연이 부드럽게 웃는 소리가 났다.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오시지 못한 거 아닙니까?” “…….” “…6명의 영혼이 모두 기억을 되찾으면, 제가 죽으니까요. 이번에 죽으면 당신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니까요.” “…….” “당신은 류를 사랑하지만… 그에게 기억을 찾지 못하도록 방해했었습니다. 부정하진 않으시겠지요. 류를 만난 것 까지는 할 수 있었지만… 그에게 세상에 대한 비밀 이상으로, 그 자신에 대한 비밀을 알려주진 않으셨습니다.” “…무연님…. 저는 구원자 따위는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류가 기억을 찾아서 예언을 이루려고 한다면, 저는 그의 예언대로 구원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구원을 하려 한 적이 없습니다…. 구원자가 되고 싶은 적도 없습니다…. “무연님…” 기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그를 불렀다. 안에서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자신은 그의 말에 부정 하지 않았다. 아이언을 잃음으로서 자신이 깨달은 것은, 절대 말하거나 밝히지 않아야 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다. 적어도 신성한 에너지로 완성된 연이, 더 이상 환생을 할 필요도 없이 다른 계(界)로 떠나는 것…. 그리하여 어떤 연관도 없이 이제 자신과 묶이지 않는 것을 막을 수 밖에 없었다. 표현하지 않는다해도, 떠날 시간을 늦출 수는 있었다. “기…” 연이 한참 후에 입을 열었다. 기는 턱을 괴고 마당의 참새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발을 걷어 연을 보거나, 혹은 그와 더 많은 것을 공감하거나… 혹은 어떤 것도 말할 수 없었다. 자신은 아이언을 잃듯이, 이 모든 것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연이 말했다. “어떤 면에서 가장 잔인한 건 당신입니다, 기.” “…….” “당신은 형제를 보호하거나 말릴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형제가 금기를 깨거나 금지에 도전하는 것을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아이언을 막을 수 있는 건 당신 밖에는 없었습니다.” “…….” “류가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깨닫게 도와 줄 수도 있었고, 신에게 아이언보다 더 설득력 있게 마음을 주장할 수도 있었고, 유퍼를 떠나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고, 그랬다면 에던도 아파하지 않았을 겁니다.” “…….” “심지어 당신은 류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오해하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붙들어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 “당신과 아이언은 영혼으로도 쌍둥이 입니다. 아이언이 열정을 가지고 행동했던 반면에, 당신은 좀 더 깊숙하게 계획을 세웠을 뿐입니다. 말릴 수 있는 일을 말리지 않았고, 막을 수 있는 일을 막지 않았고, … 충분히 신과 사제들을 설득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신다는 겁니까?” 기는 조금 흐린 표정으로 발 안 쪽을 향해 고개 돌렸다. 조용하게 앉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 뿐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나 기는 그것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의 이유였기 때문이다. 무연이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하던, 어떤 책망을 하던, 오직 이것이 이유였기 때문이다. 그가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 그의 그림자를 다시 보는 것, 다시 한번… 조용하고 깨끗한 목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그와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세계를 지키는 것…. 그를 잃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잔인하고 이기적이었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는 자신이 아이언처럼 미치지 않았다는 것에만 감사하고 있었다. 연이 그런 마음을 모를 리가 없다. 연은 자신과 아이언을 모시던 제사장이었고, 늘 그들과 함께였다. 어느 한 쪽을 아끼거나 표를 낸 적은 없지만, 연은 어떤 에너지도 느끼고 담아낼 정도로 완성되어 가는 영혼이었다. 그는 가장 신에 가까운 영혼이었다. 그가 모를 리가 없다. 흐린 휘장을 사이에 두고 자신을 보지 않아도 알고 있는 연이 바로 저 사람이다. “아니요…. 알고 있습니다.” “…….” “…알고 있기 때문에 저는 스스로 중립계에 갇힌 겁니다, 기.” 다시 침묵…. 쓸쓸한 바람이 마당을 떠돌았다. 기는 미카엘로부터 받은 사자의 서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이 곳에 어렵게 찾아온 이유를 떠올리려 애썼다. 먼 옛날, 위대한 예언자가 그 사자의 서를 주며 동봉한 편지에 이런 구절이 적혀 있었다. 「솔로몬의 봉인, 6개의 기적. 바다의 대륙으로부터 나온 6개의 십자가가 가이아와 함께 하리니…. 첫 번째 하나는 등의 표식을, 두 번째 하나는 가슴의 표식을, 세 번 째는 태어남의 표식을, 네 번 째는 무덤의 표식을 안고 있다. 다섯 번째가 입을 열면 빛이 시작되고, 마지막 여섯 번째가 빛을 잡으면 입이 닫힌다. 모든 것은 처음에서 나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리니, 신의 것은 신에게로, 인간의 것은 인간에게로….」 침묵 속에서 기가 낮게 중얼거리자, 무연이 안 쪽에서 한숨을 쉬었다. “처음에 그 서신이 개봉되었을 때, 에던이 해석을 했었습니다. 그는 예지의 천사였으므로 류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연의 말에 기도 작게 고개 끄덕였다. 지금으로써는 예언이고 뭐고, 전쟁의 결과가 무엇이든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것은 주술가 무연이 가진 힘이었다. 그와 함께 한 시간들은 항상 편안했고, 따뜻했고, 또 조금은 슬펐다. “이제 저에게 정확한 해석을 해 주시겠습니까, 연…. 우리가 그동안 알아낸 것은 6명의 영혼이 필요하다는 것 외에는 없었습니다.” “…….” “…어차피 제가 막으려했던 시간도 돌아오고 있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인연은 돌아가니 말입니다.” 안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났다. 연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다. 부드럽고 향기로운 차의 향이 우러난다. 기는 그의 향도, 그림자도, 그리고 목소리도 음미하고 있었다. 그에게 허락된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솔로몬의 봉인은, 두 개의 삼각형이 엇갈려 걸쳐진 별 모양을 이야기합니다. 6개의 꼭지점이 있는 별이지요. 그래서 에던은 6개의 영혼이 필요하다고 해석한 것입니다. 가이아는 지구, 인류를 뜻합니다. 지금의 인간계를 의미하는 바로, 6명의 영혼이 모이면, 인간계를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첫 번째 하나, 등의 표식은, 등의 날개를 스스로 자른 아이언을 의미하는 겁니까?” “…네. 그것이 절대악입니다. 두 번째 하나, 가슴의 표식은, 그것을 미리 예측하고 있으면서도… 막지 않았던 당신에 대한 예언입니다. 당신은 그 탓으로 인간의 정서를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가슴이 표식이고, 당신이 곧 절대선입니다.” “…….” “…‘세번째는 태어남의 표식을…’이라는 구절은, 세 번째 영혼인 유퍼를 가리킵니다. 그는 중립계인 환생계에서, 죽은 영혼을 데리고 오고, 앞으로 태어날 영혼을 인도하는 신이었으므로 ‘태어남의 표식’이라고 말했던 겁니다.” “…그래서 네 번째 영혼이 당신입니까?” 아주 오래전의 예언가였던 류는, 자신에 대해 ‘가슴의 표식’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아이언처럼 열정적이거나 인간을 닮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다. 그럼에도 기는 이 편지의 ‘네 번째’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시큰했다. 그는 자신이 잃어버린 인간의 본성이 아직도 살아 있음을 가끔 느꼈다. 그것은 무연 때문에 조금이라도 밝혀져 있는 본성이었다. 그런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가장 신성한 영혼 무연은 아무런 표도 내지 않았다. 이 구절이 자신을 항상 멈칫하게 만들었음에도… 처음부터 그래서 말리거나 더 나아지게 행동하지 않았음에도… “네. 네 번째 영혼은 저를 의미합니다. 무덤의 표식- 이라는 것은, 제가 굳이 태어날 필요가 없는데 태어났음을 의미하고… 예언이 실현됨과 동시에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역시 무연은 아무렇지도 않은 음성이었다. 기는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휘장 너머를 쳐다보았다. 그가 원하는 것에 절대 닿지 않을 것이다. “다섯 째가 입을 열면…이라는 구절은 예언가 자기 자신을 이야기 합니다. 그가 입을 열면, 기억을 되찾으면, 그 때야 비로소 빛이 보이고, 그 빛으로 인해 각자가 가진 표식을 분간할 수 있는 겁니다.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분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여섯번 째는 치료자를 이야기 합니다. 이 치료자가 예언자의 힘을 무력화 시킬 것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는 스스로와 스스로에 얽힌 세상에 대해 예언을 하고… 그리고… 그 예언을 완성하기 위해서 반드시 자신의 힘을 잃게 만들 존재가 필요했습니다.” “…균형의지군요…. 아틀란티스 인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용하고 과신해서 세상을 멸한 이유로… 높은 신력을 가질수록, 그것의 반대 힘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 그것이 신이 마계를 허락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예언자는 치료자를 만나면 사라집니다.” 기는 낮게 한숨을 쉬어야 했다. 강아지가 발목어귀에서 신나게 몸을 뒹굴고 있었다. 부드러운 그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기는 조심스레 중얼거린다. “그럼… 이 예언이 주는 절대 의미는 무엇입니까…. 결국 우리들의 신성함이 이기면 끝나는 겁니까? 인간의 계가 신성함으로 무장되고, 다음 계로 진화하면 끝나는 겁니까? 아니면 다시 우주가 시작되는 겁니까?” “…….” “무연, 나는 항상 궁금했습니다. 왜 신은 우리와 인간을 미완성으로 만들어놓고는… 고통 받고 고뇌할 수 밖에 없는 감정을 심어놓고는… 그것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겁니까?” “…….” “…당신은 신력이 가장 높으니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마치… 인간들의 종교에서 신이 선악과 나무를 만들어 놓고도, 일부러 의지를 발휘해서 그것을 따먹으면 안 된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거야 말로 너무나 잔인한 일 아닙니까…. 굶주린 자의 앞에 먹을 것을 두고, 그 스스로 의지를 발휘해서 그것을 먹지 말라고 말하는…. 차라리 먹을 것을 주지 말던지요….” 그때였다. 불쑥- 휘장 밖으로 푸른 잎이 담긴 차가 한잔 내밀어졌다. 볼 수 있는 것은 단아한 손목 밖에는 없다. 기는 그것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드십시오. 신의 잔입니다. 이것은 안식입니다.” “…….” 마지못해 잔을 받았다. 한 모금 마시자 입 안에서 향긋함이 감돌았다. “그래서, 길리언. 당신은 신이 잔인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모든 것을 다 알고도 우리가 언제나 갈등을 느끼도록 장치를 마련한 신이?” “…어쩌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허락될 수 없는 감정이었다면 처음부터 주지 않는 게 옳았습니다.” 완벽히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언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설령 당신 생각이 달라서, 그것이 나와 결정적으로 얼굴을 보일 수 없는 이유라 할지라도… “그렇지 않습니다, 기. 예언이 주는 절대 의미는… 사실 첫 줄에 나와 있습니다. 나중에, 당신들이 노력하여 결국 ‘사자의 서’를 열어보더라도… 어쩌면 류가 이전에 썼던 첫 번째 구절 이상을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첫 줄?” “…6개의 십자가라고 말한 바 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업(業)이라고도 부릅니다. 각자가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짊어지는 수행과제 입니다. 그것은 인류가 풀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 “…기, 신은 절대 잔인하지 않습니다. 신은 우주의 모든 영혼이 가진 가장 완벽한 성품의 조합입니다. 신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고, 아무 것도 거슬릴 것이 없습니다. 완벽하다는 말은 아무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필요를 만드는 자는, 신을 모시는 자들일 뿐입니다. 신 자체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기는 강아지를 안아올렸다. 그 때 연이 휘장을 조금 움직였다. 뚫어질 듯 쳐다보자, 희미하게 앉아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그는 그림자다. 곧 사라질 운명이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고 싶었다. 차분하고 따뜻한 음성이 들려온다. 그 음성에라도 시간을 벌고 싶었다…. “…현명하고 신성한 길리언…. 제가 가장 가까이서 모셨던 분. 인간으로부터 나왔으나, 인간 이상이신 분…. 지금부터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드리겠습니다.” “…….” “… 가장 지혜로운 답은 가장 가까이 있습니다. 답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우리가 모두 미완성인 이유는, 완성될 필요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 “…우리들 모두가 이 인간의 세계로 초대된 진정한 이유는…” 그 때 또 한번 바람이 불었다. 기는 그것이 자신이 어머니의 양수로부터 기억하는 바람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연 역시 바람일지도 모른다. 끝과 시작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바람…. “잘 생각해 보십시오, 기. 6명 모두가 무엇을 바라는지가 달랐습니다. 6명의 영혼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서로 다른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 “…또한 6명의 영혼 중에 자신에게 솔직했던 영혼은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가장 솔직했던 게 아이러니 하게도 바로 아이언입니다.” “…….” “그러나 그 역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6개의 영혼의 십자가는 그래서 서로 짊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이, 아이언은 버림받았습니다. 또한 그 기억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체벌을 받았습니다. 아이언이 그런 벌을 받는 것은, 스스로 내린 선택의 결과 입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외면할 수 없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갈 방법도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할수록, 그것이 멀어지는 것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는 솔직하려 애썼지만, 너무나 늦었습니다. 그는 충분히 솔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신 난폭해졌습니다. 이래도 신이 잔인합니까?” “…연…” “그리고 당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신은 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벌조차 내리지 않을 정도로 무관심하고 잔인하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당신조차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스스로 떠나보내야 하는 절대선이 되어야 했습니다. 절대선은 구원자 입니다. 당신은 구원자가 되고 싶지 않지만, 당신이 스스로의 마음을 감추기만 했던 결과는 이렇게 되었습니다. 절대선은 구원자가 되어 예언을 이루고, 그 예언의 결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당신 역시 솔직하지 않았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방치했던 결과 입니다. 이래도 신이 무관심 합니까?” “…연…” “… 유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는 그가 바라는 것이 당신이라는 걸 끝까지 말하지 않고 대신 비틀어진 마음으로 마계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하므로 해서, 그는 자신을 소중히 했던 천상의 에던에게 잔인한 짓을 한 것입니다. 그 결과, 현생에서는 에던에 대한 감정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것이 그의 업입니다. 유퍼는 이제 곧 후회할 것입니다. 에던을 사랑하지만, 그에게로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감정에만 너무 몰입한 나머지, 남겨진 사람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래도 신이 냉정합니까?” “…….” “… 가장 고통받는 것은 그 예언을 스스로 만들었던 예언자 류 입니다. 그는 신성을 완성하기 위해 이 예언을 직접 선언했지만, 그 결과… 가장 사랑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뺏겼습니다. 아직도 류가 진짜 당신을 사랑했다고 여기십니까? 류가 스스로의 예언을 실천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렸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것이 그 결과 입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감정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수 백명이 류에게 비밀을 이야기 해 주어도, 정작 그 자신이 아이언에 대해 품었던 감정을 기억해 내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안 됩니다. 자기가 만든 예언에 스스로를 희생한 것, 감정을 인정하지 못한 것… 그리하여 가장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망각하게 된 것… 그것이 류의 업이자, 체벌이고, 또한 십자가 입니다. 그는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보다 신이 행복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런 걸 원하셨다고 보십니까? 이래도 신이 이기적입니까?” “…….” “…당신이 곁에 두고 있으나 알아차리지 못하는 치료자 다니엘은, 전생에서 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류를 아끼고 사랑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앞서가는 류를 위해 너무 많은 걸 희생했습니다. 그는 정작 류가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자기 자신이 그저 무기력하고 무능력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선한 영혼이었지만, 그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류는 그에게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가장 친했던 다니엘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류는 죽으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니엘은 솔직했습니까?…… 그도 솔직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현생에서 그는 가장 아끼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운명에 처했습니다. 자신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이래도 신이 무능력합니까?” 조금 말의 속도를 빨리 했던 연이 잠시 멈췄다. 기는 휘장을 향해 손을 뻗다가 이내 거둔다. 비단 결계 때문이 아니라도, 중립의 계 따위는 부술 수 있더라도… 연의 말이 옳았다. 어쩌면 일이 이토록 꼬이게 된 이유는, 모두가 서로 다른 것을 상대에게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인간이나 천상의 영혼이나 모두가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다. “…아시겠습니까, 기…. 신이 무언가를 잘못되게 만들거나 판결한 게 아닙니다…. 신이 불공평했던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전의 생애에서, 그토록 낙원과 같았던 우리들이… 각자가 서로에게 원하는 게 달랐던 이유로, 모두가 자신의 소중한 어떤 것을 지키기 위해 행동했던 방식이 달랐습니다. 유일하게 같은 점은, 자신의 소중한 감정을 지키기 위해 다른 감정을 꺼내들었다는 겁니다. 모두가 누군가를 사랑했습니다. 혹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사랑 대신에, 다른 감정으로 그것을 덮기에 급급했습니다. 우리 중에 진실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가장 원하던 것을 뺏기고, 대신 원하지 않는 방식대로 살아진다는 것이군요.” “…….” 기는 무릎을 폈다. 아주 간단한 힘만으로 없앨 수 있는 휘장이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자신은 연을 잘 알고 있다. 연은 그런 종류의 일에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연을 포기하지도, 혹은 아이언이 했듯이 그것을 가지려 하지도 못하는 자신의 딜레마이다. “그 날…” 기는 잔을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 날… 우리의 운명이 심판의 제단 앞에서가 아니라, 실은 살아온 날들로 인해 결정된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그 날… 다니엘이 류와 함께 있었더라면… 아이언이 아니라 내가 예언의 글을 받으러 갔더라면… 유퍼가 그 전에 나보다 에던을 조금이라도 돌아봤더라면… 아이언이 조금이라도 류에게 표현을 했더라면… 연이 단 한번이라도 더 이 계에서 환생할 정도로 부족했더라면… 류가 예언의 글을 적지 않았더… “……!!!” 생각에 잠겨있던 기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앞으로는 여전히 익숙한 장막이 보였지만, 그는 방금 자신의 머리 속을 스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연이 마치 자신을 정확히 보고 있는 듯 조용히 말했다.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 “6명 중에 조건에 맞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저마다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고, 겉으로는 신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냥 모두를 속였습니다. 6명 중에 단 한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솔직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마음을 숨겨서 어떻게든 상황을 막고 싶었지만,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신의 섭리 안에 우연이 없는 까닭입니다.” “…….” “그러니 알고 보면 여섯 명 모두의 공통점은, 모두가 신을 배신하면서도 서로의 상대방이 그것을 모르길 원했다는 점입니다.” “…모두가 신성을 배신한 셈이군요…. 아이언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하진 않았지만…” 아아… 기는 짧게 탄식했다. 모두가 신성을 배신했으므로 그 결과, 가장 원하는 것을 빼앗기는 처지에 이르렀다. “네. 모두가요. 어떤 점들이 신에 대한 반역이었던가, 무엇이 다시 신성을 거룩하게 만들 것인가-를 찾는 게 당신들이 모인 이유입니다. 그것이 류가 천상에서의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것은, 인간이 신에게서 멀어진 이유를 찾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기는 그 말을 씁쓸히 새기며 뒤 돌아섰다. 무연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새들과 대나무들, 그리고 강아지와 고양이들이 저마다 문가로 걸어나와 인사를 한다. 싱그러운 초록 바람과, 맑은 공기들이 촉촉했다. 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입을 연다. 자신의 등 뒤로, 굳건한 결계처럼 드리워진 장막 안 쪽의 사람에게… “… 하지만, 무연…” “…….” “… 당신처럼 신력이 높은 제사장이 신을 배신할 이유가…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 뭔가 더 말하려 했으나 그만두었다. 그는 그냥 자신의 발 밑으로 드리워진 그림자만 보았다. 대답은 한참 동안이나 들려오지 않았고, 바람이 대나무의 잎을 스치는 사각소리만 들려왔다. 부드러운 미풍의 끝에서 연이 입을 열었을 때, 그의 음성은 아주 조금, 아주 약간만 가라앉아 있었다. “…기…” “…….” “…저도 안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다음 번 환생에서 저 자신이 없어질 경우를 대비해서…” “…….” “… 당신을 위해 류를 키웠습니다. 저는… 전생에서 평생을…” “…….” “… 류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도록… 암시를 걸었습니다. 당신이 신성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 아아… - 라고…. 기는 움직이지 않고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하고 원한다는 이유로…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만 사랑한 것…. 그러나 그것이 너무나 자기 사랑이어서… 결국에는 상대방에게 닿지 못하거나, 너무나 늦게 도착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후회, 각자의 삶에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업을 쥐어주게 된 이유…. “안녕히 가십시오.” 한동안 멈춰선 시간 사이로 연이 말했다. 기는 푸른 대나무의 그늘을 슬픈 듯 바라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평화가 위대한 제사장과 함께….” 대답은 아주 한참 뒤에, 자신이 몇 발자국을 뗐을 때야 들렸다. 희미하고 조용한 음성이다. “…또한 위대한 구원자와 함께….” 하늘이 어두워졌다. 기는 두 번 다시 이 곳을 찾지 않길 바라며, 쓸쓸히 돌아섰다. 돌아서는 길에, 어디선가 아련하게 돌아오는 듯한 차의 향기, 가장 조용하고, 가장 이기적이었으나, 또한 가장 아프게 떠날 사람의 영혼에 입을 맞췄다. 그는 지금까지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연으로 인해 오늘은 알 것 같았다. 길고 길게 돌아온 시간… 모두가 자신을 희생자라고 여기고, 혹은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상대방만을 생각하면서 속여 왔지만… 결국 누구의 십자가도 가볍지는 않았다. 억지로, 거짓으로 뭔가를 막고 싶었지만, 그 결과 모두가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그 업에 책임을 질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자신 조차도 그렇다. 모든 영혼들이 늘 ‘류’의 봉인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류 자신이 그 날 신전에서 아이언을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왔다. 그러나 연의 말처럼… 류의 선택은 그냥 선택이었을 뿐이다. 나머지 조건들이 그 선택에 딱 알맞게 굴러갔기 때문이다. 어쩌면 류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나머지 영혼들에 대한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순결한 류를 통로로 해서 각자 자신의 사랑만을 채우려 했던 연과 자기 자신은 더욱…. 그리워한다는 이유만으로, 소중하고 아낀다는 이유만으로… 연을 환생시키기 위해 그 날의 사건을 방치한 자기 자신과, 환생하지 못하는 자신을 위해 류에게 대신 암시를 걸었던 연과… 누가 누구를 나무랄 수 있단 말인가, 사랑이 비밀이어야 했던 그 시대에. 그러니 한 바퀴 인연의 고리를 돌아 다시 찾아온 시간…. 언제나 일어나야 할 일은 일어나는 법…. 예언을 이루기 위해,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구원자가 되기 위해… 당신을 보낸다, 구원을 얻는다. <신성모독 神聖冒瀆 7.> 골목길의 안 쪽까지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쫓기고 있음이 분명했다. 검은 골목길의 끝에 도달했을 때야, 쫓기는 자는 겨우 뒤를 돌아보았다. 힘겹게 여기까지 달려온 자는 젊은 신학자. 그는 입으로 끊임없이 기도를 중얼거려야 했다. 자신을 쫓아온 이 검은 남자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이다. “달이라도 있어야 어둠을 비추지.” 신학자를 쫓아오던 검은 그림자가 음산하게 웃는다. 쫓기는 자의 이름은 이시영. 그는 얼마 전까지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신성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 이유로 인해 대륙과 우주계의 비밀 중 하나를 알게 되었고, 기를 위해서 정보를 찾아다녔다. 그것이 쫓겨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신성한 영혼들, 어떤 비밀을 아는 자들에게 선택받았으니 그것을 반대하는 자에게 쫓기는 게 당연하지도 모른다. 새벽 2시 30분. 시영은 부들 부들 떨리는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았다. 여기까지 30분을 주구장창 달린 셈이다. “아무도 널 살리지 못한다, 젊은 학자이자 신도.” 그림자가 말하는 순간, 시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모습, 그 자신만만한 당당함에서 죽음의 향기가 났다. 자신을 쫓아온 자는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골목길의 끝에서 숨을 헐떡이며 노려보았을 때, 그제야 그의 모습이 정확히 보였다. 그의 말처럼 달빛을 받은 악마는 굉장히 퇴폐적인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가 빛이 났다. 크고 늘씬한 체격에 입술과 눈썹에 각각 은회색의 고리가 달려 반짝인다. 관능적인 입술이 자신을 비웃듯 희미하게 조소를 품고 있었다. 시선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시체처럼 싸늘했고, 자신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리는 순간 그의 강력한 에너지가 느껴졌다. 서서히 내미는 손끝에는 길고 날카로운 흉기가 손톱모양으로 달려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천천히 짓는 흡족한 웃음이 소름 끼칠 정도다. 시영은 떨리는 목소리에 힘을 주며 기도문을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마는…” 그러나 쫓아온 자는 유유낙낙하게 웃는다. “성스러운 이름 따위는 없어.” “……!!!” “그것은 가장 필요한 순간에 당신을 배신하지.” 그 때 검은 옷을 입은 자의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굉장히 조용하고 또한 무표정하게 나타난 것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자신을 쫓은 자와는 다르게 말쑥한 검은 양복 차림이었다. 그러나 시영은 그도 역시 두려웠다. “결국, 오늘의 희생양은 저 사람입니까, 아이언.” - 라고 그가 입을 여는 순간, 더 몸이 떨렸다. 오금이 저리는 순간에, 아이언이라고 불린 검은 남자는 날카로운 칼 같은 손톱을 들어, 스스로의 이마에 십(十)자를 그었다. “희생양이 될 것인지 아닌지는 그의 태도에 달려있다.” “……!!!” 아이언은 매혹적으로 웃었다. 약간의 음산함과 허를 찌르는 듯한 음란함, 또한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살기가 깃들어진 웃음이다. 뚜벅 뚜벅… 그가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그의 그림자 뒤로 악령들이 움직였다. 시영은 그런 것을 본 적도 없었지만, 실제로 그간 보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자신과 마주한 달이 핏빛으로 변한다. 시영은 죽음과 마주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강건해지고 담대하길 원했지만, 반대로 눈물이 났다. 그러자 아이언이 스스로의 십(十)자 상처에서 난 피를 핥으며 달콤하게 웃었다. “살고 싶지?” “…….” “… 나도 살렸으면 하고 바라지. 하지만 너의 이름은 라엘. 한 때 아틀란티스의 사제로 있었지. 12명의 사제 중 하나.” “……!!!” “나는 그 시대 때도 너를 신의 장소에서 죽였다. 바로 네가 모시던 예언가가 내 손에 죽은 날이었고, 같은 장소였지. 하필이면 왜 그 장소에 있었는가, 라엘.” “……!!!”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이언이라는 악마가 자신을 살릴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죽음을 목격한 것도 죽어야 할 이유다.” “……!!!” “살고 싶다면 한 가지만 답해라. 지금 현생의 네 지도자 기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그가 바로 코 앞까지 다가왔다. 호르몬을 멈추는 음란한 사향 냄새가 났다. 시형은 어쩔 줄을 모르며 침을 삼켰다. 기가 있는 곳은 여러 개의 신성한 에너지로 보호되어 있는 곳이다. 절대 발설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아이언은 자신의 피가 묻은 긴 손톱으로 즐겁다는 듯 웃으며 시형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살자… 그리고 끔찍한 악의 절대자. 시형은 그의 눈동자 속에서 살아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직감했다. “다시 한번 묻지.” “…….” “너의 절대자 기는 어디에 숨어 있느냐…. 아니, 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줄 필요가 없다.” “…….” “… 어차피 내 형제 기는 나를 찾아올 것이니.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기가 데리고 다니던 청년이 어디에 있느냐?” “…….” 대답을 하지 않자, 아이언은 금세 지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날카로운 칼끝으로 쓰윽- 아무렇지도 않게, 그리고 가볍게 시형의 얼굴을 배었다. 길게 사선 모양으로 뺨이 찢겼지만, 사실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시형은 두려움과 공포로 완전히 얼어버린 것이다. 그것을 음미하듯, 얼음 같은 얼굴로 변한 아이언이었다. 여전히 코끝까지 얼굴을 들이대며 무표정하고 싸늘하게 말했다. “말을 하지 않을 생각이지?” “…….” “… 네가 죽어야 할 이유가 더 많아졌군.” “……!!!” “약간의 시간을 주겠다, 내가 너에게 입을 맞추는 동안만….” “……!!!” 그리고 그 찰나, 시형이 그의 말뜻을 알아듣기도 전에 갑자기 뒷머리가 휙- 하고 낚아채졌다. 거센 힘으로 옭아맨 얼굴은 그대로 차디찬 입술에 닿는다. 속이 헤집어 지고, 마치 폐까지 시린 얼음이 흘러드는 기분이었다. 머리 속을 아찔하게 잠식하는 독한 향기와, 입 안을 휘젓는 섬뜩할 정도의 쾌감이 교차한다. 심장이 얼어붙을 정도로 오싹하는 짜릿함이다. 시형은 정신이 멍해졌다. 거칠고 음란하게 움직이는 혀의 마디가 자신의 이빨을 쓸어갔다. 움켜진 머리카락은 리드미칼하게 움직이며 혀와 혀가 엉키도록 강요한다. 마침내 참지 못한 젊은 학자는 간신히 그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희미하게 속삭였다. “에던에게…” “…….” “… 기는 에던에게, 혹은 지로에게…” 그러자 그 말의 여린 숨결을 다 빨아들일 듯 차갑게 쳐다보던 눈길이 쓰윽 하고 가까워졌다. 다시 숨 막히는 입맞춤이다. 학자는 손마디가 떨릴 정도로 강렬한 기운을 담았다. 체온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감각이 심장을 꿰뚫는다. “……!!!” 그리고 끝- 시형은 악마와의 키스가 절정에 이를 무렵, 목에 날카로운 통증을 느꼈다. ***** “목이 잘린 얼굴에 키스하는 것은 나쁜 습관입니다, 아이언.” 유퍼가 싸늘하게 말했다. 기령은 지루한 표정으로 자신이 잡고 있던 머리카락을 놓아버렸다. 데굴… 잘린 목이 굴러간다. 둥그렇게 치켜 뜬 눈이 보였다. 공포와 쾌감이 동시에 찾아들어 강렬한 엑스터시 아래에서 죽은 것이다. 기령은 그 순간에 시형의 목을 단 칼에 그어 버렸다. 그나마 죽은 자를 향해 베푼 최대의 아량은, 그가 환각상태에 빠진 동안 죽였다는 것이다. 죽은 후의 끔찍함은 오직 그것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골목길의 끝이 핏자국으로 잔뜩 어렸다. 더군다나 아직 신경이 남아 있는 몸이 꿈틀거린다. 그것을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며 기령이 명했다. “… 알아서 치워라, 유퍼.” “… 환생계로 가지 못하게 완전히 소멸하라는 말씀이시지요. 알고 있습니다.” 한 두번 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라고 유퍼는 쓰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찾기 전보다, 기억을 찾아가는 요즘이 가장 고통스럽다. 유퍼는 서서히 자신을 찾아오는 기억 속에서, 그 전생에서의 아이언과 지금을 도저히 매치 시킬 수가 없었다. “사실은 치료자가 어디 있는지 관심도 없지 않습니까?” “…….” “… 인간의 영혼을 우리 계에 끌어들이는 것도 하나의 전략인데, 왜 불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많은 사람을 죽이는 겁니까.” 그러자 돌아서던 기령이 몸을 빙글 돌렸다. 젊고 아름다우며 차가운 얼굴, 서늘한 기가 솟아나는 차가운 눈동자로 기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왜냐고?” “…….” “… 이게 우리가 맡은 역할이니까. 이렇게 해 주길 인간들이 계획했으니까. 그들이 우리를 버렸고, 인정하지도 않았고, 비틀어지게 놔두었으니까.” “…….” “어두운 골방 지하에 오랫동안 가둬놓고, 우리는 그들에게로부터 없어져야 할 그 모든 것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유퍼.” “…….” “동정하거나 흔들리지 마라. 네가 모든 걸 다 기억해내고,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우리는 구원이 될 수 없다. 인간들이 스스로 그렇게 규정했으니…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그들이 두려워하는 일을 실현하는 거다.” 유퍼는 그의 분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를 이해하고, 그와 동감했지만, 도무지 그의 방식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휙- 차가운 바람소리를 내며 기령은 등을 돌렸다. 그는 류의 과거 사제들을 모조리 찾아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들 역시 신성한 가지 가운데의 하나이고, 그들 중 일부는 반드시 지금도 기와 함께 일한다는 것이 그의 이유였다. 기가 데리고 있다는 마지막 치료자를 찾는 것- 기령은 그런 이유를 댔었다. 그러나 유퍼는 믿지 않았다. 사실은 오직 살육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 것이다. 지금의 기령에겐 살기와 색기가 하나의 관념이었다. 둘 중 하나를 억누르기 위한 살인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 증거로 지금 자신이 내려다보는 잘린 목의 주인은, 오늘로써 3번째 희생자다. 유퍼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 또한 류도 고통스러운 마음이었다. 비록 여느 때처럼 초연하게 그를 보고 있었지만, 처음 맡아보는 피 냄새에 속이 뒤엉켰다. “성스럽지 않은가, 예언자. 네 동료의 피인데…….” “……!!!” 그가 휘장을 걷고 들어섰을 때는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그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불한당처럼 들어선 남자는 자신의 자리처럼 털썩- 의자에 앉았다. 검은 셔츠를 한번에 벗는 순간 피 냄새가 훅-하고 끼친다. 모르긴 해도 피범벅의 냄새다. 곧이어 미끈한 갈색 상체가 불쑥 드러났다. 절대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문신도 드러났다. 단단한 복부를 바라보며 류는 들리지 않게 한숨쉬었다. 그러자 기령이 이내 비웃듯 입술 끝을 삐딱하게 올린다. “너희의 말에 따르면 순교한 것이지. 그러니 기쁘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 “사실 한두번도 아니야. 순진하고 순결한 예언가만 몰랐을 따름이지.” 그는 담배를 빼 물었다. 인간으로써의 그가 담배를 무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류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누군가 죽었다. 그러나 반대로 그 말은,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기령에게는 이런 일이 하루 이틀에 걸친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그럴수록 빨리 연의 말처럼 기억을 되돌리는 게 필요한 것 같다. 이토록 진하고 고통스러운 피의 축제가 두려웠다. “오늘 하루 동안도 열심히 기도했는가, 류?” 조롱하는 그의 말에 류는 아무 대답도 없이 가만히 쳐다보았다. 조금 창백해진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기령은 코웃음을 치고는 고개 돌린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사실은 딱히 아무 것도 그의 마음에 안 들 것이다. 미끈한 그의 상체에는 희생자에게서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그것은 말라붙어서 갈색의 무늬로 번져 있다. 게다가 이마에는 전에 없던 새로운 상처가 있었다. 십(十)자 모양의 상처였다. 류는 그것에 집중하려 애썼다. 묘하게 시선을 사로잡는 상처다. 한번도 아니고, 여러번 그은 상처다. 담배를 든 손목에도 새로운 상처가 있었다. 누가 악마의 육체를 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자신 외에……. 담배를 피며 어딘가 피로한 표정으로 가령이 중얼거렸다. “환생에 환생을 거듭하다보면, 누군가는 삶에서 반드시 한번쯤 희생자가 되고… 또 누군가는 한번쯤 살인자가 되지.” “…….” “그러니 이제 다들 그런 표정 좀 그만둬.”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 당당하고 수려한 그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조금의 의혹. 스스로가 살인을 몇 번씩이나 하고도 납득하지 못하는 저 표정……. 류는 그의 십자 무늬 상처에서 문득 그런 것을 엿보았다. 그리고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스스로가 걷잡을 수 없어서 살인을 하고…… 그러나 그러지 않기를 정말 원하고 계신 건 아닙니까?” “……!!!” 어쩌면…… 그것은, 아이언이 한 때 천사였다는 유퍼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처음 놀란 듯 기령이 휙 하고 고개 돌렸다. 물론 그 시선은 이내 거두어졌지만 말이다. 그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듯 가슴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냈다. “잘난 척 하지마라, 사제.” “…….” 류는 자신이 꺼낸 말에 불현듯 입술을 깨물었다.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의 이마와 온 몸에 남은 상처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이마의 상처는 홀로 새기신 것 아닙니까? 손목의 상처도요.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는 겁니까?” “…….” “자기 자신에게 피를 내지 않으면 누군가를 죽일 수도 없다…. 그런 것이 아닙니까…. 자기를 학대해야만 타인을 공격할 수 있다… 이런 것이 아닙니까?” “…….” “정말 딱한 것은 당신입니다, 기령. 스스로가 가진 강한 힘을, 강력한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습니다. 인정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닥쳐.” 기령은 못참겠다는 듯 쥐고 있던 셔츠를 휙 하고 던졌다. 머리를 마구 거칠게 쓸어 넘기고 욱하는 표정으로 크게 다가선다. 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네가 내 감정에 대해서 뭘 안다고?” “…적어도 당신이 한 때 신성한 영혼이었다는 건 알아냈습니다.” “…그게 전부가 아니지.” 어딘가 이를 악물고 말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류는 이제 그가 두렵거나 그렇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이 잔인하고 냉혹한 영혼이 두려웠던 적이 없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다. “신에게 버림 받은 게 그렇게 큰 상처였습니까?” “……나는 신 따위에게 버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 류.” “스스로 타락한 것도 결국은 그 마음을 견딜 수 없어서 아닙니까? 당신이 외면당한 것을 왜 다른 존재에게 풀려고 하십니까?” 그러자 기령은 이상하게 웃었다. 견딜 수 없는 웃음이라는 점만 전해져 왔다. 진정으로 웃는다는 것을 완전히 잊은 것 같았다. 두근 두근- 다시 류는 심장이 뛰었다. 조금 전에 역한 피 냄새로도 심장이 뛰었었다. 그러나 이 두근거림은 그것과 다르다. 이 역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조금 더 환각같은 두근거림이다. 기령은 쓴 웃음을 몇 번이나 지으며 피식거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생각을 지우듯 다시 몇 번 고개 젓다가 이내 류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훅- 하고 몸이 기우는가 싶더니, 강한 힘이 어깨를 잡고 빙글- 돌려세웠다. “……!!!” 정신을 차리자, 자신의 몸이 창틀에 엎드리듯 대어져 있다. 등 뒤에서는 새벽의 침입자가 바짝 몸을 붙여온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져 왔고, 등 뒤로 돌려진 팔이 쓰라렸다. 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또 다시 시작이다. 그는 살인과 살기의 악마이기도 했지만, 환락과 음란의 존재이기도 하다. “너는 항상, 내가 듣고 싶어하는 말의 반대만 이야기 하는구나, 류.” “… 자업자득입니다.” 목덜미 뒤 쪽에서 짙은 숨결이 느껴진다. 그는 자신의 목에 얼굴을 묻고, 자업자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듯 키득거렸다. 류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들어 창틀을 꽉 쥐었다. 동시에 뜨거운 기운이 살갗을 물들인다. 이것은 이른 새벽의 공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향이다. 바로 세속적인 향이다. 저속한 어지러움을 주는 향과 더불어 천천히 손길이 느껴졌다. 느린 손길이 반쯤 엎드린 자신의 셔츠 안 쪽을 파고든 것이다. 류는 순간적으로 숨을 들이쉰다. “……!!!” 윽- 하고 저절로 탄식이 삼켜졌다. 뜨거운 입술과 그 입술에 달린 차가운 링의 느낌이 대조적이다. 단 한번 가졌던 고통스러움을 떠올리며 저절로 몸이 굳었다. 그러나 그 기억과는 상관없이, 느린 고문처럼 노골적인 유혹이 등을 점령한다. 쏟아지는 숨결과, 콧끝을 산란하게 자극하는 묘한 향과, 더불어 등 뒤에서 앞쪽 가슴을 파고드는 노골적인 손길까지. “그래서…… 결국 당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류는 입술을 반쯤 깨물고 중얼거렸다. “신을 모욕하기 위해 나를 억지로 갖는다… 뭐, 이런 겁니까?” “…….” “… 그게 당신과 기의 차이점 입니다. 당신은… 내 모든 걸 가지고 날 죽일 수 있어도…” “…….” “내 입에서 나오는 어떤 말도 당신을 축복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자 갑자기 뚝- 등과 어깨에서 셔츠를 벗겨 내리며 이어지던 입맞춤이 끝났다. 그리고는 처음에 몸이 돌려진 것과 같은 힘으로, 다시 빙글- 세상이 돌았다. 신경을 가다듬자, 반쯤 벗겨진 자신이 서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옷차림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도 거기 있었다. 조금 전까지 보이던 일말의 인간성, 그런 것들은 말끔히 가신 눈동자다. 냉혹하기 그지없고, 싸늘하기 이를 바 없는 시선이다. 그것이야 말로 기령에게 어울리는 눈동자였다. “뭘 잘못 알고 있군. 축복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류.” “…….” “한 때 너에게 너무 많은 축복을 받았지. 한 때 너에게 너무나 많은 축복을 했지. 네가 태어났을 때도, 살아갈 때도, 마지막 숨을 거둘 때도… 언제나 너를 축복했지. 그러나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어차피 지금은 상관없는 일….” “………!!!” “너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다, 예언자. 몸은 가질 수 있지만 수천 년이 흘러도 마음은 주지 않겠다는 너의 의지……. 나는 이미 저번 생애에서 그걸 혹독히 배웠다.” 그는 한 때 당신의 수호 영혼이었습니다- 라는 말이 떠올랐다. 표정없는 그 얼굴에서 문득 유퍼의 그 말이 떠오른다. 그러나 순식간에 기령의 시선은 검게 바뀌었고, 그는 차가운 칼을 꺼내어 단번에 스스로의 복부를 옅게 그었다. “……!!!” 무슨 짓을… 류는 숨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사선으로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다소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억센 힘이 자신의 머리를 꽉 눌렀다. “핥아라.” “……!!!” “두 번 말하기 싫다, 핥아.” 설령, 그가 억지로 자신을 가졌다 하더라도… 류는 자신의 쪽에서 먼저 그에게 손을 대거나 만진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강한 힘이 자신이 몸을 억지로 앉힌다. 무릎을 꿇린 자세에서 류는 코끝까지 들이미는 피 냄새를 맡았다. 심장이 마구 뛰어 오른다. 단단하고 미끈한 갈색 복부에는 여러 상처들이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이런 종류의 일이 많은 것 같았다. 자기에게 낸 상처의 숫자만큼 사람을 죽이고, 영혼을 거두어 갔다. 류는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었다. “망설이지마라, 류.” “…….” “네 마음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다.” 마침내 포기 당했다. 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분노로 부들 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이 잔혹한 영혼이 만족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혀를 내밀었다. 갈라진 피부의 틈으로 미끄러뜨리자, 입 안으로 피가 스며들었다. “…욱…” 짧게 신음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것조차 용납이 안 된다는 듯, 더욱 강한 힘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류는 심하게 뛰어 오르는 심장을 잠재우며 다시 눈을 감는다. 이번에는 보다 마음을 굳게 먹고 상처를 핥기 시작했다. 상처를 핥아갈 때마다 역한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고, 대신 묘한 두근거림만이 이어졌다. 빗금처럼 날카롭게 쳐진 무늬를 다 핥았을 때…… 숨이 절로 차올랐다. 미묘한 긴장감에 너무 오랫동안 호흡을 참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더욱 강한 힘이 머리를 더 숙이도록 강요당했다. 그 잠깐의 휴식도 허락받지 못했다. “……!!!” 류는 저항하듯 천천히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기령이 오만한 미소를 짓는다. 비웃는 그 표정에 류는 침을 삼켰다. 입 안으로 피부의 서늘한 감촉과 매끈한 정염이 전이되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다. 발바닥에서부터 발목으로… 분노와 수치가 뒤범벅된 채 열기처럼 타 오른다. 그러나 상당히 강한 거부감으로 노려봤음에도, 기령은 이미 확고했다. 류는 자신의 무릎 꿇린 몸을 지탱하기 위해 한 손을 들어 그의 복부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 아래로 조각같은 몸이 닿았다. 그 상태로 그는 몸에서 기운과 생각을 빼 내듯 깊게 심호흡을 했다. 뒷머리채를 쥔 기령의 손길이 더욱 강해졌다. 그대로 류는 그의 상처 없는 복부까지 쭉 따라 핥아 내렸다. 그리고 더욱 천천히… 아래로 이끄는 힘에 따라 바지 버클 위에 까지 입술이 닿았다. 아주 잠깐을 망설였고, 그러나 단호하고 잔인한 손길을 느끼며 천천히 차가운 금속 버클에 얼굴을 묻었다. 한번도 해 본 적이 없지만, 그가 고개를 들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마치 명령처럼 쏟아지는 거센 힘에 이끌려 입으로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비록 품성은 악마였지만, 인간의 몸으로 미세하게 움틀거리는 근육들이 느껴졌다. 불에 데인 듯 타는 입술과, 그 서늘한 피부의 감각은 류에게 새로운 고문과 같았다. ***** 류는 그에게 신성을 기억케 내려는 자신의 노력이, 그저 그를 자극할 뿐임을 알아야 했다. 혹은 기령에게 그것을 새로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도 보통의 방식이 아니라 소름끼치도록 무너지는 방식으로…. 기령은 실컷 자신의 몸을 희롱하던 자를 잡아 억지로 일으켰다. 발갛게 달아오른 피부와 달끈한 시선이 묘하다. 그것을 원했고, 또 자신의 바람대로 되었다. 강제로 턱이 들려진 채, 조금 전까지 강요로 남근을 핥던 입술이 벌려져 있었다. 기령은 그것을 보는 순간 숨통이 꽉 죄여오는 기분이었다. 얼마큼이나 그를 절망하게 만들고, 또 얼마큼이나 상처를 주고 싶었고, 그에 배로 모욕하고 싶었는지…… 그런 갈망이 얼마나 겹겹이 쌓여 있는지…. 그것은 스스로도 표현하기 힘들었다. 다만 원하는 것은… 그가 기억을 해 내든 못 해 내든, 마음 없는 몸이라도 내 것이라는 의식 뿐이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의 몸을 이렇게 보았을 것이다. 또한 태어나서 처음으로 누군가의 몸을 억지로 애무해야 했을 것이다. 그 탓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수치심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어지간해서 보기 힘든 그의 분노도 담겨 있었다. 그런 감정을 표내지 않으려 한 탓인지, 혹은 너무나 정신없이 봉사를 강요당한 탓인지, 그는 겨우 고개를 떼도록 허락받자 입술을 다물지 못하고 뜨거운 김을 토해냈다. 낯뜨거움과 스스로에 대한 수치감으로 달아오른 몸도 자극적이었다. 더군다나 붉은 입술로 토해내는 할딱임이 역시 그러했다. 그가 무척이나 노력했음에도 그것을 감추지 못한다는 것에 기령은 조금 만족했다. 그래서 지체하지 않고 그 입술에 입을 맞췄다. 목구멍 깊숙이 밀려오는 악마의 혀에 그가 잠시 몸서리친다. 그러나 봐줄 용의가 없었다. 그를 위한 지난 100년이 아쉬움이었고, 100년이 기다림이었으며, 또한 100년이 쓰라림과 상실감이었고, 나머지 100년은 그리움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마음을 알지도, 읽지도, 돌아보지도 않았다. 결정을 번복하지도 않았고, 자신이 그를 죽여서라도 얻고 싶었던 단 한 가지 마음도 보여주질 않았다. 그러니 그 긴 시간 동안의 보상은 이제 그의 성스러움을 타락시키는 것으로 만족하고 싶었다. 기령은 정말 그렇다고 여겼다. “…으응……” 불분명한 신음이 류에게서 흘러나왔다. 목을 꽉 움켜쥐고 입을 열도록 강요하자, 작은 헐떡임이 쏟아져 내린다. 그대로 입술을 열고 거세게 밀려들어가 각도를 바꿔댔다. 조금 바둥거리던 저항이 곧 체념으로 바뀐다. 자신의 것을 품었던 붉은 입술이 곧 낼름거리는 타락의 혀를 받아들였다. 허나 기령은 곧 더 큰 난폭함에 휩싸였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여 그를 벌하고 싶었던 그 격한 감정- 그러나 그것들조차도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고 있다. 가까이 있고, 숨결을 나누지만 결코 일치되지 않는 이 기분은, 영원히 인간과 신들에게 버림받은 그의 세계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류가 자신을 버린 것은, 모두가 자신을 버린 것과 같았다. 기령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는 집착에 좌절했다. 열이 오른 몸과 쾌감에 빠진 몸은 앞으로도 만들거나 가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진정한 한 가지는 언제나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끝없이 끝없이- 목구멍 깊숙이 키스하며 빨아들이고, 거세게 깨물어버려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가질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다. 자신에게 허락된 것은 수치감에 붉게 젖은 피부와, 도발처럼 사람을 짓누르는 붉은 입술과, 그리고 그의 몸 밖에는 없었다. 영원히 함께 하더라도 자신이 끝내 가질 수 있는 것은 그의 모든 것이 아니라, 극히 일부분인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것은 자신에게 만족감이 아니라 깊은 상실감을 더해줄 것이다. 가지면 가질수록, 텅 비어가는 기분이 될 것이다. 마음속에서 이는 끝없는 매달림이 거추장스럽고 화를 돋우었다. 점점 더 거칠어지고, 마침내는 잔뜩 유린한 입술을 물어뜯어댈 때에는 류가 작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아…ㄱ…” 그대로 입술을 떼어낸다. 벌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며 입술의 상처를 깨무는 류가 보였다. 그대로 쫓기듯 창틀에 그를 앉혔다. 물론 허락도 없이 거칠게 그의 양 다리를 벌린다. 그가 앉은 작은 창의 등 뒤로 동이 트고 있었다. 불타는 해가 떠오르며 하얀 넓적다리에 붉은 잔상을 남겨댔다. 기령은 그의 다리를 억지로 열어 해가 비추는 부분을 따라 천천히 입을 맞췄다. 고통이나 반항 때문인지, 혹은 처음 맛보는 타인의 충격이 아슬아슬해서인지… 혀가 닿을 때마다 그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기령은 그것을 신경 쓰여하는 자기 자신에 가장 분노했다. 매끄러운 감촉마저 고통스러울 정도다. 수줍은 듯 부끄러운 듯, 숨기려는 반응이 심장을 짓눌렀다. 어쩐지 그에게 다정해지고 싶을 때마다, 기령은 스스로를 강하게 나무랐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그의 피부 아래에 진한 자국을 남기는 것으로 표시가 났다. 진정 휘저어놓고 망쳐 놓고 싶었지만, 수많은 시간동안 단련된 이 성스러운 정신은 결코 이 몸과 같이 추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대한 증거로, 그의 피부는 반응처럼 뜨거워졌으나 한 손은 간신히 버티려는 듯 창틀을 꽉 쥐고 있었다. 허벅지 사이에는 벌써 반응이 보이지만, 그것을 거부하듯 다리는 자꾸 닫힌다. “……!!!” 그 버티려는 모습을 보자 기령은 마침내 더 지독한 마음이 되었다. “벌려라.” “……!!!” 부드러운 피부에 입술을 대고 단호하게 말했다. “둘 중 하나를 택해. 벌리든지…” “…….” “아니면 내 부하들에게 억지로 벌려져서, 개처럼 돌림을 당하든지….” 그러자 천천히- 부들 부들 떨리는 감촉과 함께 양 다리의 힘이 풀렸다. 기령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그의 다리를 있는 힘껏 벌린다. 그가 전율하고 있는 감촉을 마구 만끽하고 싶었다. 떠오르는 태양의 희미한 빛 아래, 그의 수치를 감상하고, 부끄러운 열락의 개폐를 들여다보았다. 피부 속까지 관찰하는 듯 자신의 혀와 손가락이 움직였을 때, 마침내 그가 한 손을 들어 스스로의 입을 막았다. 더군다나 옷깃을 젖히고, 그의 허벅지 사이에 얼굴을 묻자, 허리가 가늘게 떨리며 잔뜩 피하려는 기색이다. 그러나 기령은 자신의 가장 간단한 힘 하나로도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자신을 축복하지 않는 혀를 벌하고, 결코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정신을 유린하려 애쓴다. 밝아오는 아침의 상쾌함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호흡이 흐려지자 일순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 안심조차도 웃기는 감정이다. 가장 천하게 다루고 싶지만, 그 순간마다 자신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지금까지도, 여전히. “……!” 마침내 그가 허리를 움직이며 몸부림칠 때까지, 그의 입김이 잔뜩 뜨거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몸을 들었다. 안 쪽의 살갗이 뜨겁게 긴장해서 여기까지 떨림을 전한다. 기령은 몸을 일으켜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집중했다. 한 쪽 다리만 발목을 잡아 자신을 삽입할 수 있도록 높게 들어올린다. 그 순간에도 노골적으로 그의 눈을 쏘아보았다. 질끈 감고 있던 눈이 열리고, 체액과 타액으로 찐득 찐득해진 그의 입구에 자신의 단단한 것을 가져다 대는 순간, 눈동자에는 혼란과 충격이 흘러가고 있었다. 기령은 망설이지 않고 한 손으로 그의 목덜미를, 그리고 나머지 한손으로 발목을 잡은 채 한번에 몸 안으로 침입한다. “…아…” 다시 한번 피하려는 듯, 짧은 신음이 튀어 나왔다. “…싫…” 늘 도도하고 깨끗하게 말하는 입술에서 억눌린 신음과 함께 애원하듯 거부가 튀어나온다. 그 정도 솔직함이라도 만족해야지… 라고 스스로를 비웃으며 기령은 몸을 움직였다. “…으윽…” 그의 목을 잡아 가까이로 당기자 입술을 피하려는 듯 고개가 돌아간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폭력이 행해졌던 전날을 떠올렸는지 이내 포기하고 말았다. 기령은 그의 갸름하고 아름다운 얼굴을 삼키듯 키스했다. 귓불과 턱 선에 이르는 수많은 세포들에 안녕을 고하고, 자신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인간의 몸인 그가 그래도 조금씩 쾌감에 길들여지는 것을 깨달으며… 적어도 거기까지라도 만족하려 애쓰며… 쓰윽- 하고 밀어올릴 때마다 내벽이 움틀거리며 자신을 밀어내거나 감싸 안았다. 접합 지점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 계속 복부를 희미하게 자극해댄다.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기령의 시선에 류가 몇 번이나 버티기 위해 애썼다. 그의 눈동자가 자신을 피해 허공을 향할 때도 집요하게 기령은 따라붙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교접 이상으로 시선을 잡아먹으려는 긴장이 벌어졌다. 류가 고개를 숙일 때마다 뒷 머리채는 더욱 강하게 잡혀 올랐다. 두 번 다시 나를 잊지 않게 해 주마- 라고 기령은 악으로 속삭였다. 그러자 흔들리는 눈동자가 가까스로 자신을 향한다. 달싹이는 붉은 입술이 심하게 떨고 있었다. 멍하니 자신을 주시하는 눈길, 환락과 고통의 테두리에서 강한 감정을 힘겨워 하며 떨리는 입술- 그 모든 것이 그가 얼마나 버거운지를 나타내었다. 더군다나 그 상태로 꼼짝도 못하고 자신의 내부를 채운 남자의 시선으로 다시 관통 당한다. 기령은 그렇게 천천히… 아래의 몸과 위의 시선을 모두 장악했다. 류가 마침내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질끈- 시선을 닫을 때까지. 기령은 비겁하게 시선을 피한 그를 벌하듯 거칠게 몸을 밀어올렸다. “……!!!” 그리고 갑자기 주륵- 그의 몸 안에서 짐승 같은 배설이 이뤄졌을 때, 마찬가지로 응시한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눈동자에 서서히 퍼져가는 하얀 황홀경을 바라보며, 기령은 그가 고통 이상의 뭔가를 느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렇다는 것에 흘린 자책의 눈물이라는 것도…. 허나 그 순간, “…아이언…” “……!!!” - 이라고 그가 불렀다. 기령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아니, 거꾸로 솟을 핏줄기라도 있다는 것에 경악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자신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는지조차 잊었다. 눈을 조금 깜박였고, 늘 차갑고 표정없는 얼굴에 조금의 의심을 담아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다시 한번- 뭐라고 불렀는지, 어떤 음성으로 불렀는지, 다시 한번!!!!!! 그러나 그는 맨 정신이 아니었다. 기령은 순간적으로 그의 허리를 꽉 끌어당겨 하체를 붙인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얼굴에 엉겨 붙어 있었다. 단 한줄기의 눈물자국이 그의 얼굴에 남겨져 있다. 마치 오래전의 어떤 날과 같았다. 애증이 흘러내린 몸을 꽉 붙인 채, 기령은 무표정하게 그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었다. 조금 더 밝아진 여명이 그의 머리카락에서 따뜻하게 쏟아져 내렸다. “……???” 이윽고 류가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그는 기령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오히려 의아한 듯 응시했다. 조금 전에 자신의 입에서 뭐라고 불렀는지, 혹은 왜 자기가 이유도 없이 울었는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열기가 남겨진 아련한 얼굴을 바라보며 기령은 다시 아득하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에는 천지창조도 멈춘 것 같았다. 아주 오래전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그 시절에, 그러나 반대로 영원히 돌아가고 싶은 그 시절에, 류는 항상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그런 목소리로, 그런 아득한 감정을 담아서, 그럴 때마다 그 이름은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이름이었다. ***** 유퍼가 여느 때처럼 아침 신문을 들고 들어오는 순간, 기령이 벗은 상반신에 검은 셔츠를 걸치며 나오고 있었다. 유퍼는 그가 나오는 류의 내실을 한번 힐끔 보고, 무표정하게 눈썹만 움찔거린다. 기령 역시 별 달리 할 말이 없어보였다. 그는 서늘한 얼굴로 부하가 건네는 담배를 받아들었다. “이젠 아침까지도 계시는 겁니까?” 마침내 잔소리 비슷하게 건넸을 때, 기령은 약간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넘긴다. “아니. 새벽에 갔던 것 뿐이다.” “… 어차피 제 말 같은 건 듣지도 않으시겠지만…” “… 위대한 예언가에 대한 예의를 지켜라? 내가 그래야 할 필요가 뭐가 있지?” 자신이 할 말을 다 알고 있는 머리 좋은 주인은 피식 웃으며 담뱃불을 붙였다. 유퍼는 불편한 마음을 거두고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기에 대한 정보를 알아냈습니다.” “……???” 어차피 기령과 류의 관계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한다고 들을 두 사람이 아니라는 점만 알고 있다. 자신의 역할이란, 주인이 너무나 목적의식에서 멀어지지 않게만 만드는 것이다. “기가 연을 찾아간 일 이후로 활동 범위를 넓혔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 그게 우리가 그들을 공격하는 이유이기도 하지. 그래서?” “… 기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인간이 치료자라는 것을 여전히 모르고 있습니다.” “……!!!” “어떻습니까? 공평하지요. 그는 치료자를 데리고 있으나 그가 치료자인지도 모르고, 우리는 그가 데리고 있는 인간이 치료자라는 건 알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릅니다.” 담배 연기가 쏟아져 내렸다. 검은 눈매의 아름다운 남자가 자신을 골똘히 쳐다보며 표정없이 연기를 내뿜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하얀 연기와 붉은 입술을 굉장히 퇴폐적인 기분을 주었다. 유퍼는 그가 자신의 보고에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령이 입을 열 때까지 그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었다. “나도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 “… 류가 기억을 찾는다는 것은, 그의 신성함이 깨지는 것과 관련이 깊다는 것.” “……!!!” “… 문득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매번 그를 안을 때마다 그는 항상 더 기억에 접근하는 기분이 들더군.” 유퍼는 잠시 눈을 깜박였다. 처음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잠시 숨을 들이쉬는 동안 그 뜻이 똑똑히 와 닿았다. “그러니까… 류 님이 가진 신성함의 벽이 깨어질수록 그가 과거를 기억해 낸다는 의미입니까?” “… 그렇지.” “… 그럼… 그가 과거를 기억해 냄과 동시에 예언의 힘을 갖게 되면, 그의 신성함은 거의 타락의 경지겠군요.” “… 지금의 상태로 보면 그렇지.” “일석이조군요. 영혼을 타락시키고, 예언의 힘과 기억을 되살리고, 결국 그것으로 우리를 위해서 일하게 한다- 라는.” 그 때서야 비로소 유퍼는 주인이 한 말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의 반짝이고 차가운 시선을 가만히 바라보는 순간, 그가 자신을 시험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실제로 유퍼 자신이 점점 더 전생의 기억을 찾을수록, 환생계에서 마계로 옮겨온 이후로 다소 악랄해지고 차가워졌던 영혼이 문득 녹는 기분이었다. 그 때문에 ‘기억을 찾는다’ 라는 것은 유퍼에게도 필요하지면서도 한편으로 불안한 일이었다. “뭘 원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기령은 조금 즐겁다는 듯 눈빛을 빛냈다. 반짝- 갑자기 서늘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보자 유퍼는 몸이 굳는다. “유퍼.” “…….” “…에던을 기억하느냐?” “… 아니요.” 그의 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입가의 양 쪽에 비웃음이 짙게 매달려 있다. 유퍼는 잔소리와 걱정이 많았던 자신이 그에게 부담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유퍼에게도 기억을 되찾는 것은, 과거에 자신은 환생계에서 마계를 선택했지만, 지금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것을 잘 아는 기령이 자신을 시험하는 것이다. 무엇을 원하는가- 라는 의문이 피오를 때까지 기령은 느긋하게 자신을 쏘아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상한 일이군. 기를 먼저 기억해 내고 에던은 기억하지 못하다니.” “……???” “전생에서의 너는 항상 에덴 같은 건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나와 함께 마계로 건너온 것도 기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말이다.” “… 누군지 모릅니다.” 이상한 기운에 휘말리는 기분이다. 어찌 기령이 날이 갈수록 악독해지는 기분이었다. 특히나 류와 함께 있을 수록, 더욱. “내가 한 말을 기억하지, 유퍼.” “…….” “너와 류, 그리고 치료자, 이렇게 세 사람은… 자신에게 전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감정과 사람을 가장 나중에 기억해 낸다. 아마도 지금의 현상도 그런 것 같군.” “……???” “재미있어, 유퍼리어. 좋은 기회야. 네가 주인인 나의 의심을 완전히 지워 버릴 수 있는 기회지.” 두근 두근- 유퍼는 그가 말하는 에던이 누군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쳐다보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손가락에 걸린 담배에서 하얀 연기가 여전히 자욱하다. “머리 좋은 녀석이니, 잘 알고 있겠지, 유퍼.” “…….” “… 내가 너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거다. 너 역시 류가 온 이후로, 그리고 연에게 다녀온 이후로 너무나 착해지는 것 같아. 내가 날마다 더 악랄해지는 이유는 너의 그런 변화와도 관련이 깊지.” “… 아이언?” “… 가서 에던을 죽여라.” “……!!!” “… 에던이라고도 부르고, 지금은 ‘지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가서 죽여.” 지로는 아직 완전히 자신의 기억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처럼, 최근의 그가 류의 문제나 여러 가지 일로 그에게 불평을 했다하더라도… 만약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누군가를 죽이라고 말했다면 들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랐다. 자신을 시험하기 위해 누군가를 살해하라는 명령, 그리고 마치 에던이라는 그를 자신이 알았는데 지금은 모른다- 라고 말하며 매우 흡족해 하는 모습은 꼭… “하지만 왜…” “…왜라니? 그는 천사 중 하나다. 천사들의 편이고, 기를 돕기 위해, 연을 돕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 하지만 아무 짓도…” “어떤 짓을 하건 아니건 죽어야 하는 건 맞다, 유퍼. 역시 갑자기 없던 갈등이 생기나 모양이군.” 유퍼는 초조하게 머리를 감싸며 신음했다. “아니요. 갈등이 아니라…” “어차피 우리 부하 중에 그냥 인간은 에던을 죽이지 못한다. 보다 강력한 녀석이 가야하지. 그러니 네가 적합해.” “…아이언.” “처음부터 너는 내가 직접 류를 납치해 온 것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 그러니 좋지 않은가? 내가 류의 기억과 힘을 되돌려 놓을테니, 너는 가서 필요도 없는 천사 따위는 없애버려.” 단호한 어조… 그리고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엄격한 말투- 검고 긴 속눈썹 사이로 색스로운 눈동자가 빛나고 있었다. 유퍼는 스스로도 왜 망설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그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 상관의 명령에서 불순함을 찾는 스스로의 선함이 거추장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기령은 할 말을 끝냈다는 듯 고개 돌렸다. 반대로 자신의 손바닥 안에는 촉촉이 식은땀이 밴다. “잠깐만요.” 문까지 걸어갈 때는 유퍼도 약간 제 정신이 아니었다. 물론 그를 따라다닐 때도, 누군가를 죽이거나 납치하거나 파멸할 때도 마음에 갈등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만큼 유한 성격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을 죽이라는 말에 왜 자신이 갈등을 느끼는지는 납득되지 못했다. 유퍼는 자신의 속을 흔들어놓은 기령을 보다 싸늘하게 쳐다보았다. “……???” 둔탁한 나무 문의 고리를 잡으며 유퍼는 심호흡을 한다. 그리고 아직도 볼 일이 남아 있냐고 묻는 그 검은 두 눈에 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이언님이 원하는 게 뭔지 알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따라 이곳까지 온 것에 대해 확신을 원하시는 겁니까?” “ 그래.” “… 그렇다면 제가 에던을 맡고, 당신이 류를 맡는다는 의미겠군요.” “그렇지.”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칼칼했다. “좋습니다, 아이언.” “…….” “… 그럼 저도 충고 하나 해 드리죠.” 찌를 듯이 날카로운 눈동자가 자신을 향한다. 유퍼는 스스로도 도박을 하는 기분이었다.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 막연한 위태로움- 에던이 죽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길래… 라고 몇 번이나 머리를 흔들었지만 소용 없었다. 그는 갈비뼈 밑에서 훅- 하고 끼얹는 정체모를 불길을 느끼며 강하게 말했다. “아까 류 님이 불경해질수록, 타락할수록 기억이 돌아온다고 하셨습니다. 기억이 돌아올수록 예언의 힘도 찾는 것이구요.” “… 그래서?” “… 간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굳이 시간 낭비를 해서 뭐 하시겠습니까?” 유퍼는 다짐했다. 내가 에던을 죽이든 말든 그건 아무 상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시험하는 것은 견딜 수가 없다- 라고. 그러니 나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악랄해질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것이다. 당신이나 나나, 버림받은 세계의 영혼들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유퍼?” “… 아이언. 이곳에는 당신 말고도 수많은 사내들이 있습니다.” “……!!!” “굳이 당신이 류의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를 갖는 거라면, 모두가 갖더라도 상관없는 것 아닙니까?” 메마른 목 너머로 침을 삼키며 유퍼는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자 아무런 기색도 없던 눈빛에서 조금씩 얼음같은 살벌함이 퍼져갔다. 나도 당신을 시험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언. 내 기억의 조합으로는, 당신이 그의 수호자였습니다. 아무리 스스로 선택해서 타락한다 한들, 자신이 한때 아끼던 소중함을 들개들의 먹이로 주실 수 있습니까…. 당신이 하면 저도 합니다. “유퍼.” “…….” 한동안 말없이 노려보던 눈길이 조용히 자신을 향한다. 냉기가 도도하게 아름다운 얼굴로 지나가고 있었다. 유퍼는 입안마저 바싹 말랐다. 그러나 지지 않는 눈길로 쏘아보자, 기령은 작위적인 조소를 지으며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좋아.” “……!!!”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가 또 뭐가 있지?” “…….” 유퍼는 순간 그에게 허를 찔릴 기분이었다. 하나 둘 셋- 무의식 중에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숫자를 세다가 그는 그 방을 걸어 나왔다. 졌다-. <신성모독 神聖冒瀆 8.> 돌아온다던 기는 연락이 없었다. 별달리 할 일도 없었기에, 치유는 지로를 따라 그의 가게를 도왔다. 실제로 같이 일을 해보니 더욱 그가 얼마나 사랑받는 존재인지 알 것 같았다. 명색이 선술집의 주인이었지만, 지로가 하는 일은 그저 가게 문을 열고 술이 떨어지든 말든 손님들과 노닥거리는 게 전부였다. 사실 그 가게의 손님들마저도 바라는 게 없어보였다. 술집 주인은 그저 예쁘게 웃고, 머리에 두건을 하고 마치 최신 힙합 전사처럼 춤을 추며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누군가는 절실히 사랑할 사람이 필요했고, 치유가 보기에 그들에게는 지로가 그것에 적합했다. “지로, 12번 테이블 김치찌개 추가요.” “그런 건 없어. 직접 해다 먹으라 그래.” 안주를 추가시켜도, 지로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그 예쁜 눈으로 샐쭉하게 웃으며 유유낙낙 대답할 뿐이다. 치유는 마침내 어깨를 으쓱하고는 앞치마를 둘러맸다. 그래도 한 때 고결한 신의 아들을 자처했던 자신이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궁금했지만- 그래도 하는 수 없다. 지로는 가만히 놔두기에는 겁나는 인간이다. “아니, 손님이 막 들이닥치는데 도대체 뭐하세요?” 손님들은 늘 미어터질 듯 많았고, 한 테이블이 빌 때마다 그 좁은 공간으로 또 들이닥쳤다. 그런데도 지로는 가끔 주방의 밖으로 연결된 발코니에 나가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여유롭게 담배나 피고 있다. 안주 접시 몇 개와 술병을 가득 들고 치유가 인상을 찡그리고 잔소리 하면, 그는 그 말이 듣기 싫다는 듯 ‘흐응’ 이라고 짧게 콧소리를 내며 밖만 내다보곤 했다. “정말 돈을 벌 생각은 있는 거예요?” 치유는 마침내 빈 접시들을 탕-하고 주방에 내려놓으며 주방 아저씨를 향해 물었다. 마찬가지로 머리에 두건을 쓰고 담배를 물며 요리 삼매경에 빠진 주방 요리사는 상당히 더운 기색이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붉어진 치유를 향해 악당처럼 웃고 있다. “젊은 사장이잖아. 원래 저래.” “… 월급은 제 때 받아요?” 그러자 해적 요리사는 씨익 하고 웃었을 뿐이다. 그리고는 방금 요리한 김이 모락 모락 나는 계란말이를 내밀었다.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의 어깨를 툭- 하고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우리 사장이랑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하네, 친구.”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어쨌든. 앞치마 매고 도와주고 있잖아? 몸도 튼튼하고 인물도 좋으니, 조금만 더 웃어주면 손님들도 좋아할 거야.” 제가 웃을 양의 2배를 이미 당신네 사장이 웃고 있다구요. 치유는 투덜거리며 계란말이를 들고 3번 테이블로 갔다. 바쁜 테이블을 돌며 힐끔 쳐다볼 때마다 지로는 의기양양하게 손님들 사이에서 웃고 있거나 주로 밖이 내다보이는 발코니에 가 있었다. 뭐라고나 할까… 그것은 꼭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자세여서 치유는 입을 꽉 다물었다. 속으로야 열불이 터지고 한 마디 하고 싶었지만 굳이 참는 셈이다. 뭔가 나쁜 말을 하기에는 그의 단아한 등이 너무나 외로워보였다. ***** 마침내 마지막 테이블까지 행주로 뻑뻑 닦았다. 선술집의 밖으로는 어둠이 이미 짙게 깔려져 있다. 치유는 뭉친 근육을 풀며 다 쓴 행주를 주방으로 던진다. 자신을 이상한 노동의 세계로 초대한 젊은 천사는 여전히 발코니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손님들 다 갔어요.” “… 아하~” 예쁜 얼굴이 그 때서야 밤 하늘에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기분이 묘하다. 누군가에게 휘둘리고 사는 일은 꿈에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무런 힘도 쓰지 않고 어딘가 묘하다는 기분만으로 자신을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다. 제길…. 그토록 봉사와 헌신을 필요로 하는 수도원에서도 자신은 늘 농땡이를 쳤었다. “너무 딱딱한 표정 짓지 말라구, 형제.” “당신하고 형제하고 싶지 않아요.” “… 헤이~ 별 거 아니었잖아, 사실? 불쌍하고 헐벗은 사람을 위해 일했다고 생각해.” 너무나 생글거리면서 말했기 때문에, 치유는 눈썹을 쓰윽 밀어올렸다. “항상 이런 식으로 누군가를 부려 먹는 거 아니예요? 그 예쁜 얼굴로 확 후려가지고… 맞죠?” “… 예뻐? 음… 그럴지도….” 붉은 머리카락을 보니 또 마음이 이상하게 욱씬거린다. 이해할 수 없을만큼 모든 부조화를 닮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발코니 난간에서 몸을 돌렸기 때문에, 그의 등 뒤로 흐린 밤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의 위치는 높지 않았지만, 고개 턱에 자리잡았기에 이 위치에서도 아랫동네가 넓게 보인다. 총총히 켜진 가로등과 늦은 시간까지 불이 잔뜩 켜진 난쟁이 건물들도 눈에 들어온다. 치유는 마찬가지로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그가 기댄 난간의 옆에 기댄다. 그의 입술에 내내 달려 있던 담배를 불쑥 빼내어 난간 밖으로 던진다. 그리고는 여전히 그것을 즐겁다는 듯 웃고 있는 예쁜 얼굴을 향해 또박 또박 말했다. “당신은 불쌍하지도 않고…” “…….” “…헐벗거나 굶주리지도 않았고…” “…….” “… 게다가 인간인 척 하는 천사일 뿐이잖아요. 담배 좀 고만 펴요.” 지로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래?’라는 표정으로 웃음을 지으며 느긋하게 난간에 팔꿈치를 올렸을 뿐. 말똥 말똥 자신을 쳐다보는 눈길이 옆 얼굴에 와 닿는다. 한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새삼 누군가의 시선이 따가운 기분이었다. 치유는 짧게 헛기침을 하며 진지해지려 애썼다. “기는 왜 연락이 없어요?” “…연락이 있었어. 내가 여기 내내 나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고….” “……???” 지로는 담배를 찾기 위해 청바지 뒷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빈껍데기만 나오자 허탈한 표정으로 보더니 훅 구겨버렸다. 반면 치유는 그의 일상적인 말들이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보기에 지로는 하루 종일 거의 아무 것도 안 하고… “채널링을 하고 있었어.” “……???” “…일종의 텔레파시지. 돈 드는데 굳이 핸드폰 쓸 필요 없잖아? 천사에서 인간이 되면서 유일하게 좋은 점이라고나 할까…” 아까부터 조금씩 눅눅하더니 급기야 굵은 빗방울이 두두둑- 떨어졌다. 발코니 쪽으로도 몇 방울인가 들어온다. 치유는 눈살을 찌푸리며 밖을 내다보았다. 습기가 가득차서 더 더웠던 모양이다. “나도 가르쳐 줘요, 텔레파시.” 뭐든지 자기들만 알고, 자기들끼리만 알아서 하잖아- 라고 치유는 작게 투덜거렸다. 지로는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달콤하게 웃었다. “쉬워.” “…당신들한테나 쉽겠죠.” “아냐. 모든 인간들은 할 수 있고, 원래는 아주 오래전에 그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이지. 핸드폰의 원리와 같아. 정신을 집중하고, 영력을 개발하고… 인간의 불완전한 파장이 안정된 파장으로 정리되어 주파수 영역대를 통과하면…” “… 그게 어렵다는 거잖아요. 보통의 인간들은 안정된 파장을 가지기 어렵다구요.” 그러자 지로는 자신의 주머니를 찾다 지쳤는지 치유에게까지 손을 뻗었다. 애당초 텔레파시 이야기는 그에게 흥미가 없는 것 같았다. 오직 남겨진 담배가 없는지 치유의 엉덩이 쪽 주머니를 마구 뒤집는다. “뭐하는 겁니까!!!” 움찔- 그저 타인의 공습에 놀란 치유가 몸을 뒤로 빼내자, 그는 얄밉게 키득거린다. “텔레파시 같은 거 하지 마. 별로 좋지도 않아.” “… 하지만 편하지 않나요?‘ “… 으응…. 편할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고…. 별로 원하지 않는 소식을 들을 때는 아예 듣지 않기를 원하지.” 살짝 관찰하듯이 내려다보자, 아무래도 표정이 조금 흐린 것 같다. 후두둑- 무섭게 떨어지는 빗소리 때문인가. 치유는 그가 무슨 소식을 들었는지 궁금했다. ‘별로 원하지 않는 소식’ 이라는 게 뭔지 의아했다. 그러나 지로는 어두워진 표정을 금세 감추고 씨익 웃는다. “안 좋은 소식 하나와 좋은 소식 하나가 있어. 어느 쪽부터 듣겠어?” “… 좋은 소식부터요.” 예쁜 얼굴 위로 물방울이 막 튄다. 치유는 저도 모르게 그의 팔을 잡고 안 쪽으로 조금 이끈다. 짧은 한숨을 쉬듯, 지로는 웃음을 띄고 말했다. “좋은 소식이란… 기가 드디어 움직일 마음을 먹었다는 거야. 류를 보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 정말 좋은 소식이군요.” 사실 기는 그동안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안 좋은 소식은…” “……???” “… 그 이유로 어제 기의 부하 중 일부가 살해당했단 소식이야. 죽은 사람은 어제까지 총 6명, 모두 너처럼 인간이지.” “……!!!” 휴우- 라고 지로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놀란 치유의 표정을 보며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밝게 만드려 애쓰는 기색이다. 그러나 비는 이미 투닥거리며 안으로 내리쳤고, 바깥쪽을 향해 있던 그의 붉은 머리 일부분이 젖어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로는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며 생글거린다. “더욱 안 좋은 소식일지도 몰라. 너도 이제 기와 함께 움직여야 해.” “…….” “죽지 않도록 조심해. 다음 생애에 또 만나려면 너무 시간이 멀잖아, 그렇지?” 치유 역시 씁쓸하게 따라 웃었다. “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으니까… 살아 남을지도 몰라요.” “… 아아, 그래.” 지로는 자신의 말에 고개 끄덕였다. 아무리 보아도 건성인 게 분명하다. 치유는 일단 그와 함께 돌아가는 게 더 급하다고 여겼다. 빗발이 더 거세지고 있었다. “혹시…” 그러나 지로의 팔꿈치를 잡아 당기는 순간, 그가 갑자기 멈칫하며 자신을 향해 고개 돌린다. “혹시, 바깥문 잠그고 들어왔지?” “… 그럼요. 문도 잠그고, 셔터도 반만 내려놓고… 영업이 끝났다는 건 알릴 수 있게 해 놨는데요.” 주방 조리사가 나간 후에, 치유는 약간 멍해 있는 지로를 위해 문단속을 철저히 했다. 혹시나 술 취한 손님들이 다시 들어와서 시끄럽게 만들까봐 문도 안 쪽으로 단단히 잠근 상태였다. 그러나 지로는 보통 때와 다르게 자신을 멈추었다. 살짝 굳은 얼굴, 그리고 싸늘한 표정… 내리깐 눈썹에서 예쁜 얼굴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은 처음이어서, 치유는 자신이 문을 잠근 게 대단한 일인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 그러나 지로가 그런 행동을 한 것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갑자기 굳은 그의 변화에 치유가 어쩔 줄 모르는 사이, 발코니와 일직선으로 통하는 주방의 문에 누군가의 발 끝이 보였다. “누구…” 자신이 입을 열자, 지로가 손을 번쩍 올린다. 아무런 말도 듣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혹시나 이런 게 ‘위험’이라는 걸까- 라고 치유는 자신의 세상모름을 조금 낙담했다. 발끝만 보이던 사내는 주저하는 기색이 별로 없었다. 소리도 나지 않고, 그다지 서두르는 빛도 없었다. 조용하고 침착하게 곧 모습을 드러냈다. “……!!!”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로의 변화였다. 신경을 잔뜩 곤두선 모습이었던 지로는 주방의 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남자에게 오히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지로…?” 치유는 그와 그가 아는 사이일까-라고 또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보기에는 지로의 표정이 사뭇 이상했다. 그는 마치 유령이라도 보는 표정이다. 치유는 그와 새로운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분명히 문을 잠궜는데-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비에 젖은 남자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검은 양복을 입고 있었다. 푸른 빛의 넥타이가 그에게 걸려 있었고, 인간의 나이로 치면 30대 중반 정도 되어 보였다. 기나 지로와는 다른 기분이었다. 정갈하고 깨끗한 생김새였는데, 얼핏 보기에도 자신만큼의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다. 가장 의아한 것은, 지로의 표정과는 상반되는 그의 얼굴이다. 무표정하고, 차갑다고 보기에는 좀 더 혼란스러움이 지나가고… 설명하기 복잡한 얼굴이었다. 마치 지로가 누군지도 모르지만, 그를 보는 순간 뭔가를 기억해 내고 싶은… 심지어는 그 남자 스스로도 자신이 누군지 의심하는 듯한 열망이 언뜻 보였다. “지로님?” 치유가 그를 관찰하는 사이, 지로는 갑자기 발을 내딛었다. 순간적으로 치유는 결론을 내렸다. 저 남자는 위험하다- 라고. 이유는 알 수 없었고, 흉기를 들거나 어떤 짓도 하지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 있었다. 그는 한마디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없었다. 모든 것이 환하고 빛나는 지로의 생동감과는 완전히 반대였다. 그러나 지로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뿌리쳤다. 서서히 남자를 향해 다가섰다. 흡사 죽었던 연인이라도 다시 마주친 표정같았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알 수 없는 얼굴… 항상 샐샐거리는 얼굴보다 더 그가 진짜 천사라는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그런 여운이 깃든 얼굴이다. 치유가 보기에는 정말 그랬다. 등장한 남자는 아무런 내색도 없었지만, 심지어는 그가 왜 지로를 찾아왔는지도 모르는 눈치였지만… “유퍼리어…” - 라고 지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는 울거나 웃거나, 어느 행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짧고 희미하게 불렀을 뿐이다. 유퍼리어… 라고.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지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일순 표정의 변화를 보였다. ***** 유퍼는 이 일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에던, 혹은 인간계에서 지로라고 불리는 인물은 그다지 힘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그가 매우 반항적인 차림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 신성계 쪽 사람들의 단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무엇보다 눈 꼬리가 약간 올라간 채 미소를 짓는 듯한 달콤한 눈매도 그랬다. 그저 예쁘장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천사 하나 쯤은 식은죽 먹기로 죽일 수 있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퍼리어…” 그러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을 때는 뭔가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유퍼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무표정하게 그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꽉 차지 할 만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을 때, 그는 양 손을 들었다. 천천히… 또한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는 눈동자로 내려다보며… “… 오랜만이야.” “……!!!” 문제는 자신이 그의 목에 손을 가져다 댔을 때도 그의 태도가 변함없었다는 점이다. 유퍼는 한순간 망설이다가 손아귀에 들어오는 목선을 깨달았다. 불쑥 힘을 주려는 순간, 물기가 묻은 깨끗한 얼굴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결 좋은 피부, 붉은 입술… 그리고 어딘가 안개처럼 먼 곳을 쳐다보는 그런 시선…. 저도 모르게 유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모르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눈 앞에 놓여진 금단의 과일처럼 아름다운 사람… 그 사람의 얼굴과 함께 자신의 상관인 기령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에던을 기억하나?」 그러자 그 강한 목소리에 담겨 있던 약간의 조롱도 떠올랐다. 단순히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일에 이렇게 수만가지 감정이 교차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 혹시…” 곧 목이 졸릴지도 모르는 남자는 오히려 씨익 웃음을 지었다. “혹시, 담배 가진 거 있어?” “……!!!” 유퍼는 그가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놀린다기 보다는… 오히려 견딜 수 없을 것처럼 웃고 있었을 뿐이다. 그의 미소가 궁지에 몰린 기분을 주는 것은 또 왜 일까- 인간으로 태어난 이후로 이런 복잡한 감정 자체도 거추장스럽거늘…. “이봐, 당신!!!” 그 쯤에 지로의 곁에 있던 청년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어깨가 넓고 체격이 자신만큼 좋은 남자다. 유퍼는 싸늘하게 지로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린다. 어떤 정보도 들어보지 못한 남자는 큰 걸음으로 단박에 그들이 있는 곳에 다가섰다. “당신, 뭐야….” 만약 그의 방해가 없었다면… 유퍼는 분명히 둘 중에 하나를 행했을지도 모른다. 지로를 죽이거나, 혹은 지로에 대한 뭔가를 기억해 내거나…. 그러나 청년은 재빠르게 지로의 몸을 잡아당겨 자신의 손아귀에서 구출해냈다. 순간, 유퍼는 온 몸에 얼음이라도 맞은 듯 시원하게 정신이 맑아졌다. 아직도 자신을 묘한 얼굴로 쳐다보는 지로와 청년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 쯤에 의미심장했던 기령의 한 마디가 다시 떠올랐다. 「이 환생이 주는 숙명은… 우리가 그 시대 때 가장 소중했던 사람, 가장 소중했던 감정을 가장 나중에 기억해 낸다는 것이지.」 “……!!!” 그의 말이 떠오름과 동시에 눈 앞에 있는 남자를 다시 뚫어질 듯 노려보았다. 몇 번인가 현장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기와는 다르게 생겼다. 기가 주는 신성함이나 순결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깨끗한 생김새였으나, 시선은 복잡하고, 유려한 얼굴은 수심과 색기가 번갈아 교차하는 기운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그를 알고 있었던가…. 에던이라는 천사를. 그러나 기령의 말을 거꾸로 해석한다면… 자신이 이름조차 기억해내지 못하는 이 천사는, 어쩌면 그 전생에서 자신에게 가장 중요했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아닌가…. 그럴 기가 없다. 자신의 되살아난 기억의 일부도, 그리고 기억이 살아나기 전에 전해 들은 어떤 정보도… 자신은 분명히 그 시대 때 대천사 길리언을 동경해왔다고 믿어졌었다. “… 헤이…. 기껏 찾아왔으면, 노려보지 말고, 담배나 좀 줘.” 천사 에던은 그런 자신의 복잡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유퍼는 머리를 흔들었다. 냉정을 되찾은 것이다. 영문은 알 수 없지만, 강력한 열기가 갑자기 심장에서 솟구쳤다. 달콤한 미소를 짓는 이 녀석을 없애야 한다- 라는 감정이 빗발쳤다. 늘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던 자신으로서는 놀라운 감정이었다. 그는 이번에는 두 번 망설이지 않았다. 눈 앞에서 생글거리는 존재를 보며 머리가 띵할 정도로 번뇌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 지로를 잡고 있던 인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유퍼는 냉정하게 소매 속에 감춰져 있던 칼을 꺼냈다. 그 단검은 아주 오래전에 기령이 선사한 것으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천재들의 축제’라는 야릇한 애칭이 있는 검이었다. 아틀란티스 시대의 누군가가 만들었다는 이 신검은, 베는 순간 영적인 존재들을 살해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였다. 그냥 인간을 죽이는 것만큼 쉽지 않기 때문에, 그 검을 쥔 사람의 살기가 영적으로 가장 최대일 때만이 검도 마찬가지로 공명하는 것이다. 유퍼는 기령처럼 이유도 없는 살생을 자행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이 검으로 많은 영혼을 소멸시켰다. 또한 지금까지 한번도 목표에서 벗어난 적도 없었다. 무능력하고, 자신에게 아무 것도 아닌 천사 따위는 식은죽 먹기였다. “… 무슨 짓이야!!!!!!!” 휘두르는 순간, 지로의 곁에 있던 인간이 휘청이는 지로를 다급하게 안았다. 검은 언제나처럼 목줄기에서 심장 쪽으로 느슨하게 휘둘러졌다. 딱 한번, 그리고 정확하고 날카롭게. “……!!!!!!” 그러나 불시의 공격을 받고 휘청인 지로 못지 않게, 유퍼는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 했다. 언제나 한 치의 오차도 없던 예리한 단검은… 허나 이번에만은 뭔가 실수를 저질렀다. 늘 상대방의 목 줄기를 베고, 가슴 쪽에서 한번 서슬 퍼렇게 비틀리던 단검…. “지로 님!!!!!!! 지로!!!!!” 지로를 안은 인간이 다급하게 그를 불렀다. 분명 검이 목줄기를 통과하기는 했다. 날카롭게, 그리고 조금의 오차는 있었지만 치명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죽어가는 천사가 아니었다. 아직도 피 냄새로 가늘게 진동하는 검, 그리고 그 검을 쥔 자신이었다. 유퍼는 칼 끝에서 자신의 신경으로 전해져오는 어떤 감촉…. 그것에 얼어붙었다. 그는 찬찬히 검을 쥔 손을 내려다보았다. 지로에게서 튄 핏방울이 손바닥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는 다시 그 손바닥 너머로 핏자국의 주인을 쳐다보았다. 견딜 수 없는 통증 때문인지, 이번에는 그도 웃지 못하고 있었다. 털썩- 작은 소리를 내며 무릎이 꺾였고, 그를 에웠싼 남자가 어쩔 줄 모르며 갈라진 목줄기를 손으로 막고 있었다. 인간 남자의 손바닥도 피로 물들었다. 그 즘에 유퍼는 숨도 쉬기 힘들었다. 분명 내가 벴는데… 늘 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는데… “…담배가 있냐고… 물었을 뿐이야… 유퍼…리어…” “……!!!” 지로는 힘겹게 기침을 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빗자국과 식은땀이 같이 맺혀졌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그리고 희미하게 키득거리는 피투성이 남자를 보는 순간 … 갑자기 모든 것이 정지했다. 유퍼는 자신이 서 있는 공간과 자신이 딛고 있는 시간의 축을 잊었다. 다급하게 지로를 부르며 지혈을 하는 인간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오직 느릿 느릿… 갑자기 자신의 마음을 찡-하고 울리는 금속의 상처 같은 광경이었다. 그는 견딜 수 없이 압박해대는 심장의 질끈거림을 느꼈다. 갈비뼈가 욱씬대고 있었다. 다시 한번 피 범벅이 된 손바닥을 내려다보자, 이제야 무슨 일을 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찰나… 유퍼는 본능적으로 희미하게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 에던…”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남자는 그 이름에 반응하듯 조용히 자신을 응시했다. 튼튼한 인간 사내의 품에 안겨서, 그리고 고통 때문에 가늘게 숨을 헐떡이면서… “…젠장…” 곧 이어 삭막한 욕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궜다. 허겁지겁 지혈을 하기 위해 옷을 찢는 남자를 바라보며… 그리고 그의 팔에 머리를 묻어버린 지로를 바라보며… 지로는 뇌가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울리는 두통에 숨이 찼다. 무엇보다 심장이 갈라지는 압박감에도 숨이 찼다. 미간이 아프고, 눈에서 열이 났다. 입을 더 벌렸지만, 다음에 해야 할 말같은 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으로, 그리고 아무 것도 떠올릴 수 없는 자신의 망각을 처음으로 저주하며 돌아섰다. 등 뒤에서 에던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자신을 공격하려는 인간 남자를 말리는 목소리였을 것이다. “… 내버려 둬….” “… 하지만!!!!!” “…부탁이야….” 유퍼는 어디로 걷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실은 자신이 걸을 필요가 없는 영혼이라는 것도 망각했다. 이렇게 철저히 인간의 아픔을 겪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마치 마계에서도 가장 강렬한 엑스터시에 젖은 것처럼, 그러나 그것이 달콤한 환각이 아니라, 명치에 손상을 입혀서 모든 감정이 조각난 사람처럼… 그는 천천히 그곳을 걸어나왔다.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에던이 누군지 기억해 내지 못하지만… 그를 죽이는 것만큼 스스로도 치명적이었음이 분명하다. ***** 류는 기령을 증오했다. 이제는 그래야 할 더 분명한 이유가 생겼던 것이다. “…… 으윽…” 두 번 째 남자가 자신의 몸을 관통했을 때는 더욱 그랬다. 코 끝으로 어지럽고 난잡한 마약의 향이 돌았다.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자극적인 환각이 계속되었다. 그 틈에 사내들은 적극적으로 류를 범해온다. 그들로서는 정말 오랜만에 인간의 몸을 가질 수 있는 허용된 시간이었다. 게다가 상대가 잡혀온 이례 오직 기령에게만 구속 받던 포로가 아닌가. “…아… 좋아….” 류의 몸 속을 거칠게 비집고 들어온 사내가 음란한 신음을 뿌렸다. 멀쩡하게만 살아온 류로서는 견디기 힘든 치욕이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아니, 아마도 이유 같은 것도 없을테지만… 기령은 그를 그 자신의 침실로 끌고 왔다. 곧 이어 들어온 몇 몇의 사내들이 류의 옷을 벗기고 개처럼 묶기 시작했다. 사지가 모두 쇠사슬에 묶였다. 목에도 개목걸이가 걸렸다.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방 한 구석에 있는 테이블을 끌고 와서 전라의 자신을 그곳에 앉혔다. 기령이 앉아 있는 침대보다 높은 테이블은, 분명 아래에서 관찰하기에 더욱 자극적일 것이다. 류는 그 상태로 쇠사슬 묶인 사지를 양껏 벌려야했다. 기령에게 범해진 것도 견딜 수 없는 수치였지만… 이것은 정도를 훨씬 넘어섰다. 마치 개구리처럼 벌려진 몸을 향하여 사내들은 막무가내 진한 향유를 바르기 시작했다. 역겨움과 아찔함이 동시에 찾아왔다. 더군다나 그들 중 누군가 그런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관찰하도록 거울을 앞에 놓았다. “…으읏…” 사내 서너 명이 달라붙어 자신의 몸을 핥아댔다. 그들이 억지로 들이대는 마약의 향이 절망적으로 고개를 흔드는 류에게 전해졌다. 이윽고 머리가 띵하게 울리고 심장이 쿵쾅거린다. “…좋아…” 그들 중 하나가 류의 몸을 밑에서 들어올렸다. 마치 양다리가 벌려진 아기를 안는 듯한 자세로… 그러나 침대에 느긋하게 앉아 요부의 애무를 받는 기령에게 더욱 잘 보이는 자세로… 밀어올린 듯 들어오려 애썼다. 조금의 정신이라도 남은 류가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나 허리를 흔들수록, 약기운에 취한 몸은 사내들의 눈요기가 됐을 뿐이다. “…아악!!!!” “… 와우!!! 꽉 죄여주네, 이 녀석…” 함부로 몸 안으로 침입한 남자는 저속한 말을 하며 킬킬 거렸다. 류는 조금의 이성으로 남은 수치심이 있었다. 고개를 돌리려고 하자 이번에는 다른 남자가 테이블 위로 올라선다. 그대로 불쑥- 얼굴 앞에 들이대어지는 남성의 상징에 류는 숨이 꽉 막혔다. 그 때 기령의 표정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할 수 있다, 사제. 어차피 나에게 받은 교육이니까.” “……!!!” 거울 앞으로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든 것이 공개되었다. 더불어 맞은 편에서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는 검은 악마의 눈에도 모두 공개되었다. 벌겋게 달구어진 채, 숨쉬는 구멍처럼 애널이 끊임없이 개폐를 거듭했다. 그것을 손가락으로 벌려 수치스럽게 만들며, 사내는 가장 안 쪽까지 뿌리채 찔러 넣었다. 그가 들락거릴 때마다 자신의 점액질들이 그의 것에 묻어 번들거린다. 류는 그것을 보는 순간 혀를 깨물고 싶었다. 그러나 혀를 깨물어 자살하기도 전에 다른 녀석의 것이 입안으로 불쑥 들어온다. “쉬지 말라구.” 남자는 음산하게 중얼거리며 웃어댔다. 류의 눈가에 저절로 눈물이 맺혔다. 그대로 다른 녀석이 다가와 접합 부분을 혀로 쓸어간다. 거칠면서도 섬뜻한 그 느낌에 류는 허리를 부르르 떨었다. 마음과는 반대로, 몸은 이 잔인한 행위들에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나 몸의 반응은 생존본능에 다름 아니다. 입과 뒤가 모두 사내의 것으로 꽉 막혀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인형처럼 몸이 움직인다. “… 뭐야, 처음 잡혀 왔을 때도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헤이, 류…. 겉으로는 순결한 얼굴을 하고… 사실은 굉장히 즐기고 있잖아.” 접합 부분을 야하게 혀로 쓸어대며 자극하던 녀석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류의 몸이 움찔거렸다. 기령은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여자의 봉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여전히 싸늘했고, 아무런 감정도 없이 류가 잔뜩 범해지는 것을 보고만 있다. “… 그만… ” 사내의 것이 비릿하게 향을 남기며 겨우 입속에서 빠져나가자 류는 신음하고 말았다. 입 가로 삼키지 못한 정액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기령은 아무런 감정없는 눈동자로 싸늘하게 말했다. “삼키지 않으면, 오늘 한 사람이 더 죽는다, 류.” “…… !!!” 류의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렀다. 잔혹한 방식과 윤간에 멍해진 정신이었다. 이성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억지로 들이킨 마약의 환각은 강렬했다. 점점 눈 앞에서 초점이 흐려지고, 숨이 가빠질 따름이다. 등 뒤 쪽에서 다리를 열고 들어온 타인이 계속 몸 안 쪽을 찔러댄다. 류는 배설과도 비슷한 자극적인 쾌감에 저절로 하복부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꽉’하고 아래 쪽에서 맞물리는 뜨거운 육봉이 느껴졌다. 아아… 라고 가는 탄식이 죄책감과 함께 솟아났다. 사타구니가 경련을 일으킬 정도로 내부가 휘저어지는 기분이었다. 스스로가 쾌감에서 도망가려 할수록 상대를 더 죄여버리고 만 것이다. “아이언…” 그러자 그들의 접합 지점을 혀로 핥으며 류의 몸을 속속들이 관찰하던 사내가 즐거운 듯 말했다. “이 녀석 갈 것 같은데요?” 류의 등 뒤에서 침입해 오던 남자가 그 말에 조금 몸을 일으켰다. 다리에 걸린 쇠사슬이 조금 느슨해졌다. 류로 하여금 스스로 허리를 자기 쪽으로 휘어서 겨우 발가락 몇 개로 버티도록 하는 속셈이었다. 이상한 자세가 되어 버렸다. 마치 스스로의 음란함을 구경시키듯 잔뜩 허리를 휘고, 무릎을 구부린 채 다리를 벌려 삽입된 부분을 적나라하게 공개시킨다. “보기 좋군.” 기령이 그 모습을 보며 얼음같이 말했다. 그러나 류의 귀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떻게든 사정의 욕구를 참으며 간신히 견디고 있었다. 치욕스러울 정도로 반응하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입술을 꽉 깨물었다. 퍽퍽퍽! 물기 어린 소리가 난하게 이어졌다. 둘러 싼 사내들 중 누군가가 반응한 류의 것을 가죽 도구로 봉쇄해 버렸다. “… 아악… ” 몸이 부르르 떨려온다. 숨통이 죄여져 오고, 억지로 들려져 서 있는 허벅지가 단단해졌다. 그러나 사내들은 지치지 않고 몸을 열고 자신들의 것을 넣었다. “아이언…” 그들 중 두 번째가 들어오면서 키득거렸다. “…이 녀석도 이제 꽤 많이 야들 야들해 졌는데…” “…….” “… 피스트 퍽 해 봐도 됩니까…?” 처음 들어보는 단어다. 그러나 류는 그것이 이것보다, 혹은 이것과 비슷하게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무리 자신이 마족들의 약에 취해 스스로 움찔거리고 있다 해도 소용없었다. “그건 류에게 맡기지.” 기령이 조용히 대답했다. “너희들 모두를 받아들이고 스스로 참는다면 시키지 않겠다.” “……!!!” “대신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소용없지.”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번째 남자가 몸 안에서 사정을 했다. 연결된 부위에서 음란한 액체가 질퍽였다. 류는 본능적으로 몸을 바싹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들어오는 남자들은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아직도 구멍이 열려져 있어!” 행위를 기다리던 사내들과 끝낸 사내들이 류의 공개된 몸 안 쪽을 관찰하며 지껄여댄다. 격렬한 행위로 닫히지 못한 그곳에서 방금 전에 일을 끝낸 녀석들의 남은 잔욕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제 류에게는 그 소리조차도 웅웅거리는 울림으로만 들렸다. 몇 명이나 그렇게 받았을까- 스스로도 처음 맛보는 욕정에 기절 직전까지 간 류는 눈 앞이 가물거렸다. 누군가 그 때 봉긋하게 솟은 류의 유두를 마구 핥고 있었다. 이미 약기운은 몸의 곳곳, 그리고 사내들이 단백질 덩어리마냥 찔러대는 자신의 내부에도 침투하고 말았다. “…아읏…” 류는 정신을 잃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곧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에서 일어났다. “악!!!!!!!!!” 정신이 번쩍 들 정도였다. 천천히 눈을 뜨자, 눈 앞에는 기령이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다가와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사내 녀석들이 헤집어 질 정도로 핥아댄 유두에 상처가 나 있었다. 이미 얼얼해진 그곳에는 붉은 핏자국이 하나 매달려 있다. 뒤에서 이어지는 남자의 삽입과 아직도 흔들리는 몸, 사정을 막히는 바람에 고통스러운 하반신과는 상관없이… 그곳의 통증은 따끔했다. 기령이 싸늘한 눈초리로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곧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머리를 묻는 여자를 내려다보며 표정없이 말했다. “기념으로 악마의 흔적 정도는 남겨야지.” “……!!!” “…그래야, 다음 번에 기억을 잃어도 이런 자신의 욕망을 외면하지 않을테니.” 무슨 일인지 알기도 전에… 기령은 자신의 귀에서 링을 하나 뽑아 들었다. 반짝- 환각과 무너지는 도덕심으로 헐떡이는 류에게는 그것이 그저 반짝이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 순간… 기령은 자신의 귀에서 뽑아든 링을, 작은 구멍이 뚫린 류의 유두에 꽂았다. “반드시 지금의 너를 잊지 않게 만들어주겠다.” “……!!!” 그는 그렇게 말하고 류의 턱을 잡아당겼다. 정작 류 자신은 몇 번째인지 모를 남자의 삽입을 받아들여야 했고, 기령은 아까부터 갈색 피부의 미끈한 여자의 애무를 받고 있었다. “…읏…” 그러나 다른 누구보다도 거칠고 생생하게 기령의 혀가 자신을 침투해온다. 거칠고, 또한 함부로 휘저어 놓듯… 마치 끝내 욕망의 분출을 참고 있는 류를 벌하듯 날카로운 키스다. 류는 정신이 멍해졌다. 그렇게 기절하고 싶었는데… 이 순간에 찾아올 것 같은 환상이었다. 너무나 음란한 키스였다. 지금의 장면에서 눈 돌릴 수 없는 류로서는 생전 처음 맛보는 자극적인 키스였다. 치열을 더듬는 혀의 마디가 느껴질 정도다. 내부를 깊숙하게 들어와서, 마치 지금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가 기령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키스다. 뇌가 녹을 것 같았다. 이렇게 죽어버리고 싶은 순간과 죽여버리고 싶은 순간이 같이 찾아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겪어본 모든 감정들의 가장 꼭대기만 뒤섞어 놓은 기분이었다. 태풍처럼, 그리고 뜨겁고 격렬한 바람처럼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아…” 그가 입술을 떼어내자, 타액이 흘러내렸다. 신음도 같이 쏟아졌다. “아아아…” 그 잔뜩 흐트러지고 음란해진 모습을 보며 기령이 웃고 있었다. 그러나 류에게는 모든 것이 희뿌옇게 보였다. 이 음란 지옥의 끝이 어딘지 알고 싶었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을 죽여주거나 구출해주길 원했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 구원은 갑자기 찾아왔다. ***** 찾아온 것은 유퍼였다. 그가 들어선 것이다. 류가 정신을 잃기 직전에 본 모습은 바로 유퍼였다. 어쩐지 그가 들어오는 순간, 류는 복잡 미묘한 아쉬움과 강렬한 증오, 그리고 죄책감과 분노, 또 한편의 안도감을 느꼈다. 유퍼는 망설이지 않고 단 걸음에 들어섰다. 휘장을 걷고 아이언의 침실 풍경을 보자마자, 그는 즉각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잔인하시군요.” 그러자 기령이 류의 얼굴을 휙 놓아버리며 지루한 듯 말했다. “네가 제안했기 때문이다.” 유퍼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조금 더 냉정하게 벌거벗은 사내들, 자신의 부하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곧 하얀 낯빛으로 정액투성이가 된 류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기절해 있었다. “에던은 죽이고 왔는가?” 자신의 등 뒤로 차가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퍼는 무표정하게 고개 저었다. “죽였습니다.” 그러자 기령이 이상하게 웃었다. 그 유혹적인 눈매가 가늘어지며 마치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너무나 작위적인 느낌, 교묘하게 가면을 쓴 느낌이 살아있었다. “거짓말 하지 마라.” “……!!!” “… 에던을 죽였다면 네가 무사할 리가 없지.” 유퍼는 이 풍경이 한심한 까닭에 고개 저었다. 그리고 그의 말도 이제 넌더리가 날 정도였다. 그 때문이었다, 기령을 향해 단도직입적으로 따진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인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네 기억 회로와 관계 된 이야기다.” 지상에 온 이례로, 이런 음란한 광경은 수없이 보아왔다. 아직도 질릴 듯한 정사의 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러나 유퍼는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초조하게 머리를 쓸어올릴 뿐이다. 이때만큼 기령을 죽이고 싶은 적도 없었다. 그가 자신의 욕망에 의해 이런 짓을 한다면 죽이고 싶을 리가 없다. 그러나, 왜 이런 행위를 하는지가 더욱 분명해지는 지금은, 유퍼 자신에게도 견딜 수 없는 감정들이 뒤범벅되고 있다. “아이언…” 그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었다. “…칼을 드는 순간 알았습니다. 나에게는 에던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 “… 그 말은… 제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이 기가 아니라… 에던이라는 증거였습니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다시 마음이 질끈- 하고 죄여져왔다. 유퍼는 아직도 머리가 얼얼한 기분이었다. 그러자 기령이 더욱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었다. 그의 아래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머리가 거슬렸다. “… 그래서 그를 죽이라고 한 거다.” “…….” “이미 돌이킬 수도 없으니. …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기억이 나기도 전에 없앨 수 있다면 더욱 좋은 거지, 안 그런가?” 유퍼는 그 쯤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렇게 분노가 솟구친 적이 없었다. 강렬한 감정이 뇌를 마비시킨 기분이었다. 그 때문이었다, 그가 아이언에게 대들 듯 소리친 것은. “아시면서도 그러셨단 말입니까?” “당연하지.” “말도 안 됩니다, 아이언. 당신이 스스로를 버렸다고 해서 저에게까지 강요하실 수는 없습니다.” 기령의 눈빛이 빛났다. 잔인한 차가움이 번뜩이는 시선이다. “무슨 말인가?” 그러나 유퍼 역시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아니, 참을 수 없었다- 는 게 보다 명확한 말이다. 그는 참으로 오랜만에 자신의 상관을 진지하게 노려보았다. “저 분요. 당신이 저기 저 분에게 하듯이… 저를 굴복시킬 수는 없단 말입니다.” 그 말은 기령의 조소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러나 반짝거리며 빛나는 그의 눈빛은 얼음장같다. 유퍼의 말에 공격받았음을 숨기지 않는 것이다. 유퍼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지긋 지긋 하다는 듯, 주변의 상황을 둘러보았다. “저를 시험해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주인님.” “…….” “하지만… 당신이 시험하는 건 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입니다.” “말이 점점 지나치군.” 기령이 싸늘하게 웃으며 손을 들었다. 그러자 일순, 주변의 모든 운동들이 정지되었다. 사내들이 아쉬운 신음을 내던지며 몸을 일으켰다. 기절한 류의 모습이 더 똑똑히 보였다. 내려뜨린 팔, 정액범벅이 된 야한 몸……. 게다가 온 피부에 구석 구석 남겨진 붉은 자국과, 아마도 기령이 직접 했음직한 가슴의 링들이 보인다. 그럼에도 기절한 류에게서는 진한 색향이 감돌았다.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음란한 광경이었지만, 적어도 유퍼에게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함껏 흐트러진 몸이었지만, 뭔가 이질적인 고귀한 느낌이 들었다. 유퍼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망쳐지지 않는 단정함을 처음 보았다. 눈을 감은 류는 마치 깊은 잠이라도 빠진 것처럼 고요했다. 갑자기 그 모습을 보자, 유퍼는 마음에서 비명이라도 울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만족하십니까' 라고-. 혹은, '언제까지 해야 만족하실 겁니까' 라고. 그것은 아마 기령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퍼는 갑갑한 넥타이를 풀며 차갑게 쏘아댔다. “제 말은 지나치지 않습니다.” “… 너도 네 스스로 이 세계로 걸어왔음을 부정하지 마라.” “알고 있습니다!!!” 마침내 소리를 크게 내지르며, 유퍼는 뚜벅 뚜벅 기령의 앞으로 다가갔다. 언제까지나 존경했던 얼굴이다. 늘 아름답고 강하며 지난 생애에서는 숨막힐 정도로 경건했던 영혼이다. 그는 목놓아 절규라도 하고 싶었다. 어쩌다 당신이 이렇게 되셨습니까, 라고. 울분이 마구 튀어 나왔다. 이렇게까지 이성을 잃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그는 기령의 쇄골을 손가락으로 툭툭 치며 강하게 내질렀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 “… 또 저에게 강요하시듯, 당신 자신이 아무리 당신의 감정을 내치려 애쓰셔도!!!” “…….” “… 당신의 날개는 아직 잘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이언. 제가 에던을 죽이는 걸 원하시지요?” “…….” 콧끝 앞에서 기령이 가진 악마의 본성이 숨쉬고 있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눈 앞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좋습니다!” “…….” “… 그럼, 당신도 류를 죽이십시오. 예언? 구원? 인간들?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이 언제 그런 거 신경썼습니까?” “…….” “처음부터 망설였던 건 당신입니다, 아이언. 제가 류님을 어쩔 거냐고 계속 물었을 때도…!!! 사실은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저질로 만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눈이 빛났다. 번뜩이는 시선이 소름끼칠 정도다. 유퍼는 휙- 하고 몸을 돌려 에던의 피가 묻은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사내들의 몸이 박힌 채, 그대로 정신을 잃은 하얀 나신에 다가섰다. 그는 그대로 류의 목에 칼을 대고 말했다. 냉정하고 서늘하게- “제가 없애드리겠습니다.” “…….” “번뇌를 없애고 싶으실테니까요. 사실대로 말해서…” “…….” “…죽이고 싶지 않으십니까? 살려서 뭘 합니까? 어차피 당신 스스로 버린 자신의 심장인데!!!!!!” 어쩌면 그것은 도박이었다. 유퍼는 진심으로 류를 없앨 생각이 없었다. 조금씩 더 강렬하게 돌아오는 전생의 영혼들이 자신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살기와 분노로 정지된 기령의 눈동자를 보며 그는 칼을 높이 쳐들었다. 엄연히, 이것은 반란과도 같았다. 손아귀에 힘을 주고 아까 에던에게 했듯이 강하게 내리 꽂는다……. “그만!!!” 그리고 쓰윽- 칼 끝이 류의 목에 닿기도 전에 얼음같은 목소리가 입을 열었다. 기령이었다. 그는 곧 표정없이 바지 버클을 채웠다. 또한 자신의 아랫도리에 끈덕지게 매달려있던 여자의 머리를 거칠게 치웠다. “나가라, 유퍼.” “…….” 유퍼는 보이지 않게 안도의 숨을 쉬며 칼을 거두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주섬 주섬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유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걸어나왔다. 침실의 휘장을 내리는 순간, 갑자기 잔혹한 비명이 귓전을 때렸다. “……!!!” 단말마처럼 울려퍼지는 비명이다. 지옥의 아비규환같았다. 유퍼는 우뚝- 멈춰선 채, 눈을 꽉 감았다. 아주 잠시의 시간이었지만,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충분히 직감할 수 있었다. 그것을 증명하듯,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소리에, 문득 오랜만의 피로감이 느껴진다. "끝내셨습니까?" 사무적으로 입을 열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기령이 그곳에 서 있었다.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대신 하얀 면에 둘러싸인 류를 안고 서 있다. 그 광경을 보자, 문득 기령에게 더욱 마음이 욱씬거렸다. 어쩔 수 없는 분이군요, 정말……. -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류를 감싸고 있는 것은, 기령의 침대보였다. 하얀 천은 이미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남은 것은 치워라.” “…….” 기령은 그 말만은 남기고 사라졌다. 류를 안은 채 차갑게 자신을 스쳐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 비린내 나는 피 냄새가 가득했다. 유퍼는 한숨 쉬었다. 안을 보지 않아도 뻔했다. 류의 망가지는 모습을 목격한 모든 이는 살해당했을 것이다. 유퍼 자신만 빼고.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기령이 자신의 말에 얼마나 자극받았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